“‘北 첫 패럴림픽’ 림주성씨 이후
화장실 등 북한 장애인 정책 변화
대북 지원 덕… 가장 기억 남아
南北 인도 협력은 상생하는 길”
흰 수영모를 쓴 소년이 7번 레인 앞에 한쪽 다리로 선다. 출발 신호와 함께 물속으로 뛰어든다. 시작부터 그는 경쟁자들보다 한참 뒤처졌다. 다른 선수들이 이미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그는 오른쪽 팔과 한 다리만으로 조금씩 전진했다. 그가 결승선에 도착하자 관중들은 지붕을 뚫을 듯한 환호성을 보냈다.

2012년 런던 패럴림픽 수영 남자 50m 자유형 예선에 북한 국가대표로 출전한 림주성 선수(당시 17세)의 당시 경기 장면이다. 북한 사상 첫 패럴림픽 출전이었다. 림 선수는 이 경기에서 꼴찌로 탈락했지만, 곽수광 국제푸른나무 이사장은 이 장면을 20여년간의 대북 지원, 남북 교류·협력 사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북한이 장애인 정책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세계일보는 곽 이사장을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국제푸른나무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국제푸른나무는 2010년 발족한 대북 지원 단체다. 림 선수의 2012년 런던 패럴림픽 출전 역시 국제푸른나무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국제푸른나무는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선수촌에 북한 장애인 선수들을 입촌시키고 중국 전문가의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북한 선수들이 지역 선수권 대회 성적이 없어 패럴림픽 출전이 불가능하자 직접 올림픽위원회를 설득해 길을 열었다. 북한 대표단의 비행기 티켓과 체류비 등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런던 교민들을 대상으로 모금 캠페인도 벌였다.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곽 이사장은 “림 선수를 계기로 북한이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장애인을 우대하는 국가라는 인정을 받자 장애인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며 “평양에서 장애인 택시 사업이 시작되고 순안공항에 장애인 화장실과 전용 주차장이 생겼다. 조선장애자보호연맹이 각 시·군마다 조직돼 북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조직이 됐다”고 말했다. 국제적 압박이 아닌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개선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국제푸른나무는 이외에도 북한 고아원·탁아소에 물품, 식량 등을 보내고 장애인 맹아학교·직업 재활 지원 등의 인도주의적 사업을 펼쳤다. 곽 이사장은 이를 위해 세 차례 방북했다.

곽 이사장은 대북 사업을 하며 이념·체제 대결을 넘어 북한 주민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서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그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 때 북한 대표단과 코파카바나 해변을 간 적이 있다. 북한 사람들이 바다를 보며 좋아하더니 그 자리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며 “인간으로서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한 마음들이 커지면 통일이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남북 민간 교류·협력은 2020년 1월, 북한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국경을 폐쇄하면서 전면 중단됐다. 이후 윤석열정부 들어 대결 국면이 심화하고, 인도적 지원을 위한 접촉마저 불허하면서 민간 교류는 장기간 침체 상태에 빠졌다. 새 정부 들어 민간 대북 접촉을 허용하고 있으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한 북한이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곽 이사장은 남북 교류·협력 단체 67개가 가입한 남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도 맡고 있다. 곽 이사장은 “기후변화 대응과 전염병 예방 같은 인도적 교류·협력은 한반도의 민족 공동체가 상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며 “북·미 대화에 따라 남북관계 역시 급격히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법·제도 정비, 민관 플랫폼 구축 등을 추진하며 민간 협력 재개를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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