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가 내세운 ‘국익 중심 실용외교’는 신냉전 구도가 굳어져 가는 현 국제 정세에서 상당한 도전 과제를 안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실용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은 나라에도 국익을 해할 시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외교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중 택일, 협상 어려운 북한…산적한 과제 어떻게 풀까
이 정부는 취임과 동시에 미뤄뒀던 청구서를 한꺼번에 내미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서해 구조물’로 압박하면서도 경제 협력을 기대하는 중국 사이에서 묘수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꺼내들었지만, ‘중국 견제’에 사활을 건 미국의 기조 변화와 그로 인해 뚜렷해진 국제사회의 진영화 속에서 얼마나 유효한 답이 될지는 미지수다.
이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친중’ 이미지에 미국이 신경쓰는듯한 정황은 계속해서 포착된다. 백악관은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한 첫 메시지에서 이례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우려한다는 내용을 담아 관심을 끌었다. 지난달에도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이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지하는 ‘안미경중’식 외교정책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주한미군 감축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은 미국의 이러한 중국 견제 움직임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미국의 우선 목표는 한국 보호가 아니라 중국 견제임을 알아야 한다”며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려는 이유도 단순히 돈을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맹국인 한국이 중국 견제에 동참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미국을 통해서야 겨우 남북관계를 풀어갈 물꼬를 찾을 수 있는 시점이라고 분석된다. 이 정부는 북한과도 대화와 협력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순순히 협상테이블에 앉기는 어려워보인다. 북한이 러시아와의 밀착으로 이득을 얻으면서 비핵화조차 더이상 협상카드가 되긴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극동문제연구소)는 “이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쪽으로부터 인도적 지원을 받지 말라고 강력한 지침을 내놨기 때문에 더 이상 인도적 지원은 협상 요소가 되기 어렵다”며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한미 군사 훈련 축소 정도는 돼야 할텐데, 결국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중국과 거리를 뒀던 윤석열정부와 달리 이번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낙관하긴 어렵다. 지난달 중국이 서해 잠정조치수역(PMZ)내 불법 구조물을 추가 설치한 사실이 확인되는 등 중국이 이른바 ‘서해공정’에 나서고 있고, 이를 불편해하는 한국 내 분위기가 전달됐을 것임에도 순순히 물러날 조짐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 기조 안에서 협력을 이어가더라도 큰 틀에서의 외교 원칙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면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불법 구조물은) 우리 주권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절대 양보하면 안 되는 문제”라며 “레드라인을 분명히 하고 이를 침해할 경우 어떤 국가에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로드맵 서두르기보다 내실 다지며 외교 지평 확대 모색해야”
서방 중심의 대중 견제 기조가 심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이 다자외교 무대에서 외교 지평을 넓힌다면 이 또한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유럽연합(EU) 등으로 외교 영역을 넓히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최 부소장은 “단순히 미·중 사이에서 레버리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규범을 만들고, 포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파트너로서 이들의 전략적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급하게 전략을 공개하기보다 신중하게 외교 정책 비전을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 가운데 이 정부는 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했다. 현 상황이 오히려 외교 정책을 구체화하며 내실을 다질 기회라는 평가다.
최 부소장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모습을 국내외적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며 “달라진 국제 형세 속에서 우리 국익이 뭔지 충분히 고민한 다음에 로드맵을 발표해도 늦지 않다. 괜히 서두르다가 실수하면, 지금 정부에겐 그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시간이 불충분한 상황에서는 이전 정부의 외교정책 중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정책을 이어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최 부소장은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지역 국가들의 수용성도 높았고, 우리 외교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름을 바꿔서라도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며 “국회에서 ‘코리아 컨센서스’ 같은 초당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정책의 동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의 전반적인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임 교수는 “우리 국내 정치, 대외적인 외교 역량, 남북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는 기술 등 종합적 역량이 필요하다”며 “당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미국과의 통상 협상을 얼마나 잘하고, 동시에 우리 안보 이익을 얻어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 순위”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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