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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文정권 가장 큰 패착은 나와 적을 구별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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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7-06 14:47:42 수정 : 2024-07-06 14: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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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 출간…박정희부터 윤석열까지 역대 대통령과 정권 평가
“정치인은 박정희·김대중·노무현처럼 결단을 내려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변화시켜야”
“제대로 된 대통령 참모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진언해 대통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야”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조화롭게 갖춘 인물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가장 이상적이란 뜻을 피력했다. 최근 출간한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사이드웨이)를 통해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는 내용을 실어 최근 정치권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킨 그 회고록이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 연합뉴스

김 전 의장은 책에서 “나는 종종 김대중의 리더십과 노무현의 리더십이 조화되는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며, “김 대통령이 존경받는 리더십이라면 노 대통령은 사랑받는 리더십이었다. 깊이와 넓이, 수직과 수평, 권위와 탈권위의 적절한 조화”라고 썼다.

 

51년 전 행정고시 합격으로 공직에 발을 담은 김 전 의장은 “내가 지난 수십 년간 관료로, 정치인으로 국정에 참여하며 깨달은 게 있다”며 “정치인은 국가와 사회의 전체 미래를 설계하고, 비전을 세우고,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치인은 결단을 내려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며 “박정희와 김대중, 노무현이 그랬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세 지도자는 ‘일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리해고를 단행할 때 왜 울지 않았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할 때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나라의 미래를 올바로 이끌어 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부터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아래서 최대의 성과를 내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때 강한 의지와 강도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가지고 해결해내는 것이 대통령의 일이고 책임이다. 그래서 최고 지도자는 때때로 외로운 것이다.”  

 

김 전 의장은 ‘1961∼2024, 이 나라의 열 정권을 돌아보며’란 부제가 달린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전현직 10명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도 소개했다. 일부를 요약해 소개한다.   

 

1964년 12월 6일부터 12월 8일 독일(당시 서독) 베를린에 도착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환영행사에서 연설하는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박정희 정권(1961∼1979)

 

내가 1973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처음 부임한 곳은 당시 상공부 산하의 공업단지관리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수출공업단지 사업을 총괄하는 곳이다. 나는 내 공무원 시작과 함께했던 그 아침, 잉크의 감각을 잊지 못한다. 갓 공무원이 된 내가 자를 대고 흰 용지 위에 일일이 직접 도표를 그리면, 대통령이 두 눈으로 확인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만은 박 대통령이 공직사회에 주문한 것이 단 하나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내 나라를 반드시 잘살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일하라.” 여러 현장과 토론의 자리에서 그는 그것을 본인의 몸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런 덕분에 경제발전의 주역인 관료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넘쳐흐를 수 있었다. 다른 개발 도상국에는 이런 공무원 조직, 이런 리더십이 없었다. 

 

1961년 5월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지독한 국가주의자였다.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인재를 모으고, 유능한 조직을 꾸려 선진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력을 과신하기 시작했다. 자원 배분이 왜곡되고 정경 유착이 일어나는 일은 그때부터 본격화했다. 그는 국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를 국가 자체라고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몰락(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은 그런 착각에서 비롯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전두환 정권(1980∼1988)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과감히 전문가에게 맡기고, 유능한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과감히 펼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5공화국에서 일해달라는 전두환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하던 김재익(전 경제수석, 북한의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로 사망)이 “각하, 제가 생각하는 경제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 세력들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여러 말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맡긴 그 순간, 그 한마디 덕분에 전두환은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경제 호황의 업적을 분에 넘치게 누릴 수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노태우 정권(1988∼1993)

 

역대 국회의장 여덟 분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언제가 가장 의회정치가 만발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했는지’를 꼽았는데, 격렬한 토론 끝에 최고 의회주의적 지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임기 내내 여소야대 국회를 상대하면서도 IMF(외환위기) 극복을 비롯한 여러 성과를 거뒀다는 이유에서다. 두 번째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또한 (전두환처럼) 자신이 저지른 죄과가 크고, 그와 그 가족들이 착복한 비자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구시대적 행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나름 발휘했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국회와 손발을 잘 맞춰 남북기본합의서 타결, 한반도 비핵화 선언, 북방외교,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남겼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의 이 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산업화 및 군부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이 훨씬 더뎠을 것이고, 그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김영삼 정권(1993∼1998)

 

김영삼 대통령은 단순하고 명쾌한 큰 승부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취임 첫해부터 하나회 척결, 고위공직자재산공개, 금융실명제 단행 등 굵직굵직한 개혁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지금 다시 뜯어보아도 어느 하나 누구도 제대로 추진하기 힘든 과제들이다. 김영삼은 자신의 직관적인 의지와 판단의 힘을 믿었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3당 합당 과정에서 보수세력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밖에 없었던 김영삼의 개혁에는 어딘가 미진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 하루빨리 민간 주도로 경제발전 전략을 전면 수정하고 그에 맞춘 경제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이미 형성된 경제 기득권을 깨기에는 김 대통령의 의지도, 역량도, 비전도 미흡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김 대통령은 이와(경제 개혁)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그다지 성실하게 습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합리적 사고와 거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감의 정치는 통쾌한 맛은 있지만 그만큼 불안하고 위태롭기 쉽다.

 

결국 제대로 된 경제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결과, 김 대통령은 1997년 11월22일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사실상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군사독재정권의 관 주도 경제성장을 거쳐, 치열하고 뜨거웠던 민주화의 시기를 지나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룬 뒤 마주한 우리 사회의 몰락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 부도 사태가 닥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대중 정권(1998∼2003)

 

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 등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우리는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빠른 2001년 8월 23일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전 세계에서 ‘이런 국민이 있는 나라는 절대 망할 리 없다’고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실용인사로 (외환)위기 수습팀을 구성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라인업이 훌륭했다.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 이헌재 금용감독위원장,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 모두 김 대통령과 연이 없는 구 정권의 경제관료 출신이었다. 이념과 정치적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업무 처리 능력, 성실성, 전문성을 중시해 배치한 것이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정치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리더십 스타일은 참으로 달랐다. 내가 경험한 그는 무엇보다 정말 부지런했다. 큰 그림을 그리고 비전을 세우는 사상가적 면모가 또렷했지만, 일을 할 때는 그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유명한 말,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으로 “국민보다 반보만 앞서서 가야 한다”라는 말은 모든 정치인이 새겨들어야 할 문장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본 대통령 중 최고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정권(2003∼2008)

 

내가 깊이 존경한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은 토론한 뒤 자기 생각을 즉각 수정할 수 있는 자세였다. 나는 이것이 가능한 지도자를 거의 보지 못했다. 어쩌면 노무현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노대통령이 나를 좋아하고 신뢰한 것은 내가 항상 당신 앞에서 ‘노’라고 얘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노 대통령이어서다. 수평적 탈권위 리더십, 토론의 리더십을 그와 같이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우리 정치사에서 그가 유일하리라.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다.

 

그런 면이 때로는 ‘너무 권위가 없다, 신중하지 못하다, 가볍다’란 식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어떤 문제에서든 진심으로 허심탄회하고 의견을 나누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 결정은 사심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진정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는 소명의식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참여정부(노무현정부) 일원으로서 후회되는 부분도 있다. 하나는 언론정책이었다. 언론을 계속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은 물론) 나중에는 지지기반이었던 ‘한겨레’, ‘경향신문’과도 척을 졌다. ‘기자실 대못 사건’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후회는 바로 정권 후반기의 부동산 정책이다. 부동산 문제는 근본적으로 수급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참여정부는 세금으로 단박에 풀려다 보니 실패를 거듭했다. 집값이 폭등하니 부동산 과세를 강화해서 잡으려고 했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절대 해선 안 되는 이야기까지 했다. “세금폭탄을 때려서라도 부동산 가격은 잡겠다”고. 정권 핵심 인사의 그런 폭력적인 발언이 정권에 대한 저항, 정책에 대한 반감을 조금씩 키우면서 일을 엎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여느 정권에서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전 대통령. 뉴시스

◆이명박 정권(2008∼2013)

 

이명박은 이때까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스타일의 대통령이었다. 기업인 출신, 그것도 불도저 정신을  내세우는 현대건설 사장으로서 다른 무엇보다 경제의 가치를 앞세우는 이였다. 결국 국민이 선택한 것은 먹고사는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판단 기준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 달랐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랐다기보다는 유불리에 기반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실리적인 정권 운영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건 그의 실리주의가 공익보다는 사익을 위해 복무한다는 혐의가 짙었기 때문이다.

 

대선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됐던 다스(DAS) 등 그 개인이 실소유한 기업을 이용한 부정 축재 스캔들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계속 확대됐다. 이명박의 리더십, 특히 경제 리더십이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불신 역시 증폭됐다. 결국 이 같은 의혹은 퇴임 후 구속되는 결말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비극인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뉴시스

◆박근혜 정권(2013∼2017)

 

박근혜 정권은 우리 사회에 여러모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다. 경제적으로는 경제민주화, 정치적으로는 탄핵이다. 2012년 대선의 가장 큰 히트상품은 바로 경제민주화였다. 역설적으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초래한 보수정권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나오니, 경제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야당과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는 허를 찔린 듯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선거전의 아젠다 다툼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뺏긴 것이다.

 

그렇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뒤 경제민주화 논의는 국정 운영에서 그 자취를 감췄다. 인수위원회 자료에서 경제민주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고, 박 대통령의 5대 국정과제에서도 빠졌다. 대신 들어선 게 ‘창조경제’다. 비록 경제민주화가 정치구호로 역할이 끝난 뒤 사라지긴 했지만 그 영향은 오래 남았다. 공정경쟁의 중요성, 정경유착에 대한 경고가 사회 전체, 특히 관료사회 전반에 퍼졌다. 

 

박근혜는 역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대통령이 됐다. 나는 탄핵 국면으로 이어진 촛불시위를 보며 우리 국민의 위대함을 생각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것을 반성하고, 그 행위가 잘못됐으면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원리를 실현하는 성숙한 민주의식이 형성됐다는 점에서 훌륭한 사회적 학습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직접 민주주의의 효능감이 권력에 대한 올바른 감시가 아니라 팬덤으로 옮아가고, 그 팬덤이 의회를 좌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문재인 전 대통령. 뉴시스

◆문재인 정권(2017∼2022)

 

문재인 대통령은 강력한 지지기반을 딛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촛불시위의 여망을 안고 출발한 새 정부에 대한 지지는 대단했다. 집권 초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문재인정권은 여러 분야에서 잘한 점도 많았지만, 나는 이 정권의 가장 큰 패착은 나와 적을 구별하는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조국 사태가 그렇게 발생했으며,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 그렇게 커졌고, 중도층의 정치혐오가 그렇게 퍼져나갔으며, 단단한 지지 세력의 반대쪽에서 공고한 안티(반대)진영이 구축됐다. 그렇게 이쪽도 저쪽도 ‘모 아니면 도’ 식의 양보 없는 대결이 시작됐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위에서 모인 국민적인 동력으로 국정 전반을  개혁하는 동시에 통합의 정치로 승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는 5년 뒤 대선 결과로 나타났다. 

 

반대진영을 키운 게 정치적인 패착이었다면, 부동산은 정책적인 패착이었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권은 부동산에 이념적으로 접근해 노무현 정권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부동산은 결국 수급의 문제인데, 공급이 충분하다고 주장하면서 부동산 관련 세제만 32차례나 뜯어고쳤다. 그 결과 부동산 세제는 전문가인 세무사도 계산할 수 없는 누더기 세법이 되고 말았다. 결국 집값을 잡으려는 노력이 집값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나는 문재인 정권이 이뤄낸 성과도 패착도 모두 원칙주의를 중시하는 (문 대통령의) 성정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문 대통령이 법조인의 원칙이 아닌 정치인의 결단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조국 사태 때 ‘법적으로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기다릴 게 아니라 좀 더 빨리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진영의 도덕성이 공격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조국 개인을 위해서도 낫지 않았을까.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대통령이 절차적 정당성보다는 정치적 결단력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둘 다 해임하거나 검찰총장만이라도 해임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윤석열 정권(2022∼현재)

 

2022년 3월 9일, 0.73%포인트 차이로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후보를 꺾고) 2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대 대통령 선거 최소 득표 차이였다. 이후 벌어진 국회와 정부, 더 정확히는 거대 야당과 용산 대통령실의 줄다리기는 이 득표율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맞물려 나는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 됐다. 입법부 수장으로서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과 만날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직접 만난 자연인 윤석열은 호방하고 깍듯하며 솔직한 이였다. 그러나 국회의장으로서 마주한 윤 대통령은 말 그대로 ‘비토(veto)의 정치’를 거듭했다. 그의 신념과 고집이 완전히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첫 공직선거 출마에서 일국의 수장 자리에 오른 자로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걸맞은 일을 잘 수행해야 한다. 국정운영에 관한 한 국민은 신인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30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극렬한 진영 갈등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올바르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 바로 ‘노’라고 말하는 참모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극도 그 곁에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최측근이라고 불렸던 최경한 경제부총리도 그러지 못했고, 대통령 옆에서 수많은 업무를 처리한 안종범 경제수석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의 참모란 단지 열심히 일한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진언해 대통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용산 대통령실에도 대통령에게 직언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공사를 막론하고 인간 관계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정확하고 정직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부하는 많은 고민 끝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듣는 이는 그만큼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옳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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