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월5일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백두진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등 한국 정부 최고위급 인사들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마주했다. 이들은 사흘 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우리 대표단이었다. 당시는 6·25전쟁이 정전을 향해 치달으며 남북한 군대, 그리고 유엔군과 중공군이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때다. 먼저 백 총리가 여왕에게 “폐하께서 한국에 파병해주신 데 대해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이어 곁에 있던 신 의장한테 한마디 할 것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1969년 5월 백 총리가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신 의장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고 한다. 영어를 제법 잘하는 신 의장이었으나 미리 준비한 발언이 없었던 만큼 한국어로 다소 장황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백 총리는 “(통역자에게 설명을 들은) 여왕께선 지극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며 “그날 저녁 신 의장은 ‘영국 버킹엄 궁전에서 한국말을 쓰게 된 것이 무한한 기쁨’이라고 이야기하며 양주를 많이 마신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여왕의 품격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즉위했다. 전쟁 기간 영국은 연인원 5만6000여명을 유엔군 일원으로 파병했다.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다. 그중 1177명이 전사했는데 대부분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여왕이 즉위 후 국가원수로서 가장 먼저 챙긴 사안은 6·25전쟁 전황이었던 셈이다. 1999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왕은 “오늘 보는 한국은 제가 왕위에 오를 당시 영국민이 알던 것과 많이 다릅니다”고 말했다. 전후 50년도 안 돼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한 것이다.

1948년생인 찰스 3세 현 영국 국왕은 6·25전쟁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잘 알기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한다. 19일 찰스 3세가 생존해 있는 영국 6·25 참전용사들을 버킹엄 궁전으로 초청했다. 노병들을 향해 찰스 3세는 “여러분 덕분에 자유로운 대한민국 국민은 계속 민주적 자유를 경험하고 있고 자랑스럽게 평화를 지켜왔다”라는 말로 노고를 치하했다. 윤여철 주영 한국대사는 “국왕이 이 행사를 각별히 챙겼다”고 전했다. 암 투병 중인 75세의 찰스 3세가 건강하게 장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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