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된 폭력으로 부정적 자아 형성
두려움·분노·자살 시도 등 후유증
무기력 젖어 심리 상태 ‘폐허’ 변해
“네 잘못 아냐” 정서적 지지 ‘큰 힘’
“내 몸은 이미 다 망가뜨렸고 내 영혼도 이미 부서뜨렸고, 네가 뭘 더 할 수 있는데?”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 동은(송혜교)이 가해자 연진(임지연)에게 한 말입니다. 더 글로리는 고교 시절 지속적인 학교폭력에 시달려 영혼까지 부서진 동은이 자퇴 후 자살 시도 등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10여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다룬 극입니다. 저에게는 동은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존엄이라곤 없는 이미 더없이 폐허죠”와 같은 대사가 매우 아리게 다가왔습니다.

때마침 터진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태로 폐허와 같을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게 마음이 쓰이던 차에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 ‘학교폭력 외상 피해 청소년 상담개입 매뉴얼 개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소년상담복지센터와 청소년쉼터, 자립지원관,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등에서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심적 고통을 접한 상담자 114명의 말 못할 절망과 분노, 희망의 사연들(2022년 4∼5월)이 담겨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따돌림과 언어폭력, 사이버폭력, 신체폭력, 협박·위협 등을 지속적으로 겪은 청소년은 대체적으로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자기존중감이나 정체감이 낮고 부정적 자아 개념을 보인다고 합니다. 긴장과 걱정, 두려움 등의 내면화 증상과 분노, 우울 및 불안 증상, 자살 및 시도 등도 흔하게 나타나는 후유증이라고 하네요.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행동을 보이며,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등 높은 대인 불안에 어른이 돼서도 대인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실제 학교폭력 피해 청소년들이 상담사를 찾아 호소한 최대 고통은 우울·위축(82.6%, 중복 측정)이었다고 합니다. 강박·불안과 등교 거부(각 34.9%), 대인 기피(31.4%), 자해·자살 사고(25.6%)가 뒤를 이었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16.3%), 충동(14.0%), 수면 문제(11.6%) 등을 호소한 청소년도 많았습니다. 피해 청소년들은 상담사가 시급하게 해결해줬으면 하는 증상으로 우울·위축(66.3%), 대인 기피(40.7%), 강박·불안(30.2%) 등을 꼽았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실무자 8명을 대상으로 심층인터뷰도 했는데 이들이 전한 피해 학생들의 심리상태는 동은이 말마따나 폐허와 같습니다. 한 상담사는 “상대방이 때리면 ‘때리지 마’라고 의사 표현을 솔직하게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자기 스스로 억압하고 억압이 조금 심해지면 자해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토로합니다. 또 다른 상담사가 전한 “자기 성격을 고치고 싶다고 문제를 호소하는데 더 깊이 파헤쳐서 들어가보면 자기 자신이 싫은 거고…. 이로 인해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대개 무기력이죠”라는 말을 듣노라면 마음 한편이 먹먹해져 옵니다.
“(폭력) 피해자가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뿐이죠. 그 사람은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덜 불행해지려는 것뿐이거든.”(‘더 글로리’ 주여정 대사 일부)
학교폭력과 관련된 위험 요인으로는 △자아존중감, 우울 및 불안 등 개인 요인 △부모의 무관심과 잘못된 양육 태도, 가정 불화 등 가정 요인 △낮은 학업 성취와 또래 관계 문제 등 학교 및 사회 요인이 꼽힙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거나 제대로 대처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사와 친구들의 정서적 지지가 가장 효과적이고 부모와의 친밀감이나 가족 응집력과 같은 긍정적 가족 관계가 학교폭력 피해 극복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친구든, 교사든, 부모든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반드시 해줘야 할 첫 번째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피해자를 만난 상담사조차 이 같은 제1원칙을 견지하지 못할 때가 있나 봅니다. 한 상담사는 “사실 피해자를 만나다 보면 역전이가 와요. ‘이 아이한테도 문제가 있구나. 네가 이러면 자꾸 당할 수밖에 없지’”라고 토로합니다.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 입장에서 보고서 중 이 대목은 밑줄을 치고 봤습니다.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견뎌주고 상담자 의견을 정말 많이 들어준 학부모 같은 경우에는 청소년들이 금방 회복하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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