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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어떤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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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29 23:11:12 수정 : 2025-06-29 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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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핵시설 공격 정당화 위해
日 원폭투하 사례 언급한 트럼프
피폭자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日 정부 항의조차 없는 부조리

일본 아사히신문 1면 하단에는 ‘덴세이진고(天聲人語)’라는 제목의 무기명 칼럼이 실린다. 지난 25일자에는 2000년대 초반 방북 취재 당시의 일화가 담겼다.

칼럼 필자가 현지 당국자들과 평양의 외국인 전용 술집에 갔을 때 일이다. 집안 일로 북한에 들어온 재일조선인 1세가 말을 걸더란다. “일본 기자인가. 이 노래 아는가.” 백발의 그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더니 침묵에 빠졌다.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 임이여.’ 생이별의 아픔을 토해내는 듯한 그의 노래에 주변이 모두 말을 잃었다.

유태영 도쿄특파원

술집을 나서자 이번에는 젊은 여성 통역이 쏘아붙였다고 한다. “왜 일본이 아니었습니까. 전쟁에 진 것은 일본인데 왜 조선이 분단되었습니까.”

글은 “부조리한 힘에 농락당해 지금도 떨어져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휴전 상태에서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끝을 맺었다.

필자는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부조리한 힘’이란 표현을 쓴 걸까. 그게 불명확해 썩 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태평양전쟁, 광복, 분단, 6·25가 하나로 이어진 역사라는 점, 전쟁의 끝에는 치유되기 어려운 개별적 아픔이 수없이 존재함을 재차 떠올리게 돼 여운이 적잖았다.

마침 그날 저녁, 일제의 패망에 관한 언급이 나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였다. 사흘 전 이란 지하 핵시설에 퍼부은 공습이 ‘결정적 한 방’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전쟁을 끝낸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공격이었다.”

얼마 전 언론에 A급 전범 도고 시게노리 전 외무상의 수첩 내용이 공개됐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인 1945년 8월8일, 히로히토 일왕이 “원자폭탄이 있으면 해안(으로 상륙하는 미군과의) 전쟁도 불가능해진다”며 강화 협상을 서두르라고 지시한 기록이 발견됐다. 원폭이 결정적 항복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트럼프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핵 무장을 막기 위한 폭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22만명의 목숨을 일거에 앗아간 실제 핵무기 사용 경험을 예로 든 것은 어딘가 부조리하다.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재일조선인도 7만명이 피폭됐고 4만명이 숨졌다. 트럼프 본인 말마따나 굳이 비유로 들지 않았어도 될 일이다.

게다가 1945년 일본과 달리 이란은 미국과 전쟁 중인 상태도 아니었다. 이번 폭격을 두고 이란은 물론 프랑스, 노르웨이 등 서방 동맹국들조차 ‘일방적 무력행사’를 금지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한다. 이란 핵 프로그램이 이번 타격으로 실제 제거됐는지를 두고도 여전히 갑론을박 중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부조리가 발견된다. 피폭자들은 트럼프가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히로시마 시의회는 26일 핵무기 폐기와 모든 무력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 중앙정부는 항의 한 번 없이 어물쩍 넘기려는 모양새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트럼프 발언을 “알고 있다”면서도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평가는 전문가들에 의해 논의돼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전쟁 책임이나 반인륜적 범죄를 희석하고 피해자성을 부각하는 데 주력하던 그간 입장에서 선회하지는 않았을 터. 지지부진한 관세 협상, 언제 본격화할지 모르는 방위비 인상 압박이 더욱 의식됐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 눈치보기로 점철된 이번 나토 정상회의 자체가 부조리했다. 트럼프를 향해 “수십 년간 그 어떤 미국 대통령도 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할 것” 같은 낯뜨거운 찬사가 회의 내내 잇따랐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끝내 전투복을 벗고 정장 차림으로 트럼프를 만났지만, 나토 공동성명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직접적으로 규탄하는 내용이 결국 빠졌다. 중동에 불안정한 휴전을 가져온 트럼프식 ‘힘에 의한 평화’가 우크라이나에는 어떻게 적용될지 지켜볼 일이다.

일본에 와서 맞은 6·25전쟁 발발 75주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유태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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