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침체 속에 물가는 치솟는, 즉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역(逆)머니무브’ 현상이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주식과 가상화폐 등 변동성이 큰 자산보다 예·적금 등 안정성이 큰 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환율 1300원선 육박… 주식시장 1년 반 만에 최저
안전자산인 달러 선호도가 커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에 근접했다. 반면 국내 주식시장은 연중 최저점을 갈아 치우면서 시퍼렇게 멍들었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는 바닥을 모른 채 추락했다.
1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1275.3원)보다 13.3원 급등한 1288.6원에 마감됐다. 원·달러 환율은 거래 내내 상승세를 유지했다. 장 시작부터 전거래일 대비 7.2원 오른 1282.5원을 기록하더니 오후엔 1290원마저 두 차례 넘어섰다. 종가 기준 5거래일 연속 상승이다. 장중 고가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이 1290원을 넘어선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후인 2020년 3월19일(1296.0원) 이후 2년2개월 만이다. 종가 기준으로는 2009년 7월14일(1293.0원) 이후 12년10개월 만의 ‘터치’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11일(현지시간) 전장보다 0.07% 상승한 104.020을 기록했다. 장 마감 기준 달러인덱스가 104를 넘어선 것은 2002년 12월23일(104.080) 이후 19년5개월 만이다. 안전자산 선호에 국고채 금리는 하락(채권값 상승)했다.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거래일보다 2.8bp(1bp=0.01%) 내린 연 2.900%에 장을 마쳤다.
주식시장은 곤두박질했다. 코스피는 1.63% 하락한 2550.08에 장을 마쳤다. 종가 기준으로는 1년6개월 만에 최저치이며 5월 들어 8거래일 연속 하락이다. 장중에는 한때 2550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외국인과 기관이 이날 하루에만 각각 2801억원, 1566억원을 팔아치웠다. 코스닥 지수도 833.66으로 전 거래일 대비 3.77%나 급락해 종가 기준 연중 저점을 경신했다.

가상화폐도 추락했다. 이날 오후 3시45분 현재 비트코인은 전날보다 14.5%나 떨어진 2만6518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서는 13.25% 떨어졌다. 비트코인 하락은 ‘한국산’ 코인으로 일컬어지는 루나(테라)가 대폭락하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테라는 전일 대비 97% 넘게 떨어졌다. 미국 달러화와 가치 연동을 표방하던 테라의 UST(테라 스테이블 코인)가 1달러 밑으로 하락하자 UST 가치 유지에 연결된 테라도 타격을 입었다. 윤창배 KB증권 연구원은 “루나 재단은 27억달러 수준의 비트코인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매물이 출회될 것이라는 우려로 비트코인 가격의 동반 하락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코스피 하락, 환율 급등 및 가상화폐 자산 하락 등은 전날 미국 뉴욕증시 급락을 통해 어느 정도 예견됐다.
11일(현지시간) 뉴욕증시의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326.63포인트(1.02%) 내린 3만1834.11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65.87포인트(1.65%) 떨어진 3935.18에 장을 마감했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373.43포인트(3.18%) 급락한 1만1364.24에 장을 마쳤다.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시장 예상치를 웃돈 것이 영향을 미쳤다. 4월 CPI는 전년 동월 대비 8.3% 상승해 전망치 8.1%를 상회했다.
◆시중 통화량 3년 반 만에 첫 감소
올 2월 시중에 풀린 돈이 한 달 새 약 4조원 줄면서 3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감소세를 나타냈다. 금리가 오르자 가계와 기업이 금전신탁, 머니마켓펀드(MMF) 등에서 자금을 빼 장기 예적금 등에 넣은 영향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12일 발표한 ‘2022년 3월 통화 및 유동성’에 따르면 지난 3월 시중 통화량(계절조정·평균잔액)은 광의통화(M2) 기준 3658조5206억원으로, 2월 대비 4조1000억원(0.1%) 감소했다. M2 기준 통화량이 전월보다 줄어든 것은 2018년 9월(-0.1%) 이후 3년6개월 만에 처음이다. 2020년 4월 처음으로 3000조원을 넘어선 후 매월 최대치를 경신해 오던 시중 통화량 증가세가 꺾인 것이다.
M2는 현금,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등 협의통화(M1)에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MMF, 수익증권 등 금융상품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통화지표다.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 자금을 의미하며, 시중 통화량을 나타내는 대표 지표다.

다만 3월 시중 통화량은 1년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10.8% 많은 상태다. 1월(12.7%)과 2월(11.8%)에 이어 증가 폭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15개월 연속 두 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다.
3월 들어 시중 통화량이 감소 전환한 것은 시장 금리 상승으로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금전신탁과 MMF에서 M2에 잡히지 않는 2년 이상 예적금이나 주식 등으로 자금이 옮겨 간 영향이라고 한은은 보고 있다. 지난 3월 금전신탁은 10조5000억원, MMF는 8조9000억원 줄어들었다. MMF는 수시로 돈을 넣고 뺄 수 있는 입출금식 단기 금융상품으로 기관과 법인 등의 투자자가 일시적으로 자금을 맡길 때 활용한다. 2년 미만 정기 예적금은 8조2000억원 늘었지만 2월(19조9000억원)보다는 증가 폭이 크게 줄었다. 지난 2월 7조6000억원 줄어들었던 수익증권은 3월 들어 5조6000억원 늘었다.
경제주체별로는 가계 및 비영리단체가 15조2000억원, 기업이 12조1000억원 전월 대비 통화량이 늘었다. MMF 자금이 빠지면서 증권·보험사 등 기타금융기관에서는 23조3000억원이 감소했다. 한은은 “가계 및 비영리단체 통화량은 수신금리 상승에 따라 정기 예적금을 중심으로, 기업 통화량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증가세 지속에 기인해 늘었다”고 분석했다.
현금,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등이 포함된 M1 평균잔액은 지난 3월 1358조8728억원으로 전월보다 0.4% 늘었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11.3% 늘어 지난해 2월(26%) 이후 꾸준히 둔화세다. M1은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해 주식 거래·부동산 자금 등 높은 수익률을 따라 움직이기 쉬운 자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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