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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우린 오랫동안 얘기를 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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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06 22:44:45 수정 : 2023-03-10 13:45:14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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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문을 통해 성장한 우리
그런 당신을 외면하고 있지 않나

켄 리우, <종이 동물원>(‘종이 동물원’에 수록,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어렸을 적에 잭이 울면 엄마는 종이접기를 해주며 달래주곤 했다. 알뜰하게 모아둔 포장지로 호랑이나 염소, 사슴, 물소, 상어도 접어주었다. 납작하게 접은 종이 동물에다 엄마가 풍선처럼 숨을 불어넣으면 마치 생명을 얻은 듯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종이 동물 중에서도 잭은 중국어로 호랑이라는 뜻의 ‘라오후’를 좋아했다. 어흥 어흥, 잭은 라오후와 놀며 성장했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자 잭은 종이로 만든 동물원 말고 친구들처럼 광선검에 불이 들어오는 스타워즈 장난감이 갖고 싶어졌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중국 태생의 엄마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미국인 남편도, 학교에서 짱깨라고 놀림을 당하는 사춘기 아들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는 점점 더 말을 잃게 되었다.

조경란 소설가

엄마는 이제 집에서도 모국어가 아니라 영어를 써야 했고 미국 요리를 배웠으며 종이 동물 접기도 그만두었다. 대화를 시도해봐도 잭은 이미 엄마 품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암이 너무 많이 퍼져서 수술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잭은 엄마 병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머릿속엔 학내 채용 설명회에 제출할 서류와 면접 일정으로 꽉 차 있었고, 그걸 모를 리 없는 엄마는 아들이 자신을 걱정할까봐 알아듣기도 어려운 작은 목소리로, 빙긋 웃으며 아들에게 말한다. “너 학교에 돌아가야 한다는 거 엄마도 알아.”

자식에 관해 엄마가 모르는 게 있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 년 후, 잭은 집에 늘어져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상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 장면을 보곤 엄마를 떠올린다. 병상을 떠날 때 엄마가 남긴 말이 있었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청명절(淸明節)에 다락에 놔둔 상자를 꺼내서 엄마 생각을 했으면 한다고. 잭이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여자친구가 예술작품 같다고 벽에 붙여둔 오래되고 낡은 종이 호랑이 라오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종이가 풀어져 버렸다. 아들이 좋아했던 라오후 종이 뒷면에, 엄마는 긴 편지를 써두었고 중국어를 읽을 줄 모르는 아들은 그 편지를 들고 중국 관광객들이 탄 버스가 서는 시내 정거장으로 나갔다. 한 여성이 벤치에 앉아 엄마의 편지를 잭에게 읽어주기 시작한다.

내용을 다 소개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엄마는 아들에게 이런 문장들을 썼다. “아들. 우리 오랫동안 얘기를 안 했지. 말을 걸려고 하면 네가 너무 화를 내서, 엄마는 무서웠어. 코네티컷주 교외에서 난 외로웠단다. 그랬는데 네가 태어난 거야! 너한테 내 언어를 가르치면, 내가 한때 사랑했지만 잃어버렸던 것들을 작게나마 다시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너한테 처음으로 종이 동물을 접어 줬을 때, 그래서 네가 웃었을 때, 난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만 같았어. 그런 네가 엄마한테 말을 안 하려고 했을 때, 또 너한테 중국어로 말을 못 걸게 했을 때 엄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때 엄만 모든 걸 다시 잃어버린 기분이었어. 아들, 왜 엄마랑 말을 안 하려고 해? 너무 아파서 더 쓸 수가 없네.”

아들은 포장지를 다시 접어 라오후를 만들었고 종이 호랑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이 단편의 줄거리는 이게 전부다. 그런데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다. 줄거리로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 더 들어주었으면 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저 깊은 물 밑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듯해서.

이 글을 쓰다가 새벽 배송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곤 잠시 나갔다 왔다. 밀린 일 때문에 어버이날까지 꽃집에 다녀올 틈을 못 낼 것 같아 얼른 휴대전화로 카네이션을 주문했다. 화원이 집에서 얼마나 멀다고. 엄마라는 문을 통해서 성장하고 컸는데도 내 생각만 하고 있다. 엄마가 진짜 원하는 건 자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일 텐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기만 해도 눈치가 빠른 엄마는 괜찮다고, 이렇게 덧붙일지 모른다. 너 원고 마감에 쫓기고 있다는 거 엄마도 알아.

“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이니까요”. 작가 켄 리우가 이 책 앞에 남긴 말이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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