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2일 사망한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장례식은 어딘지 한산한 분위기였다.
현직 상원의원이기에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비롯해 요인들은 참석했으나 ‘매카시즘’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던 인물을 보내는 사회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2월9일 공화당 집회에서 미국사회 곳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폭탄선언으로 인기스타가 된 후 계속 놀라운 폭로를 이어갔으나 4년 만에 그 폭로가 엉터리로 판명됐다.
그래서 1954년 12월에는 상원에서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이 통과됐고, 여기에는 그가 소속한 공화당의 의원들도 가세했다.
그때 매카시는 이미 정치적으로는 죽었으며, 실의에 빠진 그가 편두통이 심해 알코올에 중독됨으로써 육체적으로도 죽어가다 심지가 다 타버린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매카시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카시즘도 그를 따라 묘지에 묻혔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매카시즘은 매카시의 ‘독창’이 아니었다. 그것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였고 매카시는 오케스트라의 메커니즘에 따라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한 격이었다.
우선 매카시즘 선풍에서 그 대부격인 존 에드거 후버 연방수사국장(FBI)이 건재해 있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엘렌 쉬레커는 후버가 미확인된 정보를 매카시에게 제공하면 매카시가 이를 떠들었으니 “매카시즘이 아니라 후버리즘이다”라고 주장했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루머성 사건을 대서특필하던 보수 신문들도 건재해 있었다. 매카시가 등장하기 전 후버와 손발을 맞추었던 리처드 닉슨은 부통령으로 인기를 끌며 3년 뒤의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닉슨은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후버가 각을 세울 때 후버의 편을 들어 민주당 정부의 고위관리인 앨버 히스를 기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었다. 닉슨은 매카시가 몰락한 지 20년 뒤인 1974년에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몰락한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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