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외래사상이나 철학이 들어오면 종교가 되고 만다. 또 외래종교가 들어오면 열린 종교가 되기보다는 닫힌 종교가 되고 만다. 조선조의 성리학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그랬고, 지금도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이 극단적인 좌우대립을 연출하고 있다. 외래사상이나 종교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민족은 결코 밝은 미래를 개척하거나 선진국을 구가할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적 분열상을 보면 나라의 정체성마저 실종된 것 같다.

지식권력 엘리트들의 분열과 위선과 이중 잣대를 보면 미래가 암담할 뿐이다. 자랑스러웠던 경제개발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잔치가 어느새 민중·종북주의로 변해버렸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됐어도 창의를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기보다는 문화적 관료주의자 혹은 기술주의자들이 사회 곳곳에 옹이처럼 박혀 권세와 명예와 부를 지키기에 급급하다. 근대적 개인과 지성은 드물고, 독창적 사유와 창의를 인정해주는 곳도 드물다.
우리를 어둡게 하는 것은 사회 곳곳에 거짓과 조작이 너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이익을 위해서는 조작과 음모와 올가미 씌우기는 당연하다는 분위기이다. 국민들이 권력자의 농간에 잘 속아 넘어가는 탓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국민의 수준이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체성을 잃고 상습적으로 자기기만과 속임수를 일삼는다면 희망이 없다.
검찰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자평한 뒤 물러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가 사임 후 20분 만에 서울대학교에 복직신청을 내면서 법무부와 서울대학교 양쪽에서 월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소인배가 군자인 체하는 꼴불견이다. 부인 정경심 교수는 정형외과가 발행하는 뇌종양과 뇌경색(입퇴원)증명서를 검찰에 제출하는가 하면 첫 재판에 전직 대통령보다 더 많은 대규모 변호인단(18명)을 선임함으로써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조국가족친족’을 둘러싸고 전개된 검찰수사와 검찰개혁공방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케 한다.
우리 사회에 ‘내 탓이오’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남의 탓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경제공동체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됐지만 우리 시대를 표상하는 정치적 상징으로 우뚝 섰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박하는 올가미가 될 개연성마저 있다. 계속되는 거짓말과 허위증언, 문서조작은 우리 사회의 병인(病因)으로 뿌리내린 지 오래다.
인간의 특이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말하는 인간’이다. 말은 인간과 문화의 많은 내용과 비밀을 담고 있고, 드러내거나 폭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말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첫 번째 속성이지만 불행하게도 거짓말을 막을 길이 없는 점이 흠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고 해도 실효성은 의문이다. 인간의 대뇌에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합리성인지, 합리화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머리 좋은 사람들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몇 달째 온 나라가 매달려 끌려간 ‘조국 정국’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회자되는 ‘조국어록’은 ‘조국사전’이 될 정도이고, 정치교수에 대한 서울대 학생들의 반발도 심상치 않다. “자본주의는 부패로 망하고, 사회주의는 자충수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집권세력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의 자충수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사건건 날렸던 조 전 장관의 멘트는 모조리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현 정권이 검찰개혁의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이용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권력형 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집권세력의 불안 심리와 위기감이 작동한 것일까. 여야의 입장이 바뀐 현 정권에 박 전 대통령 탄핵과정이 반면교사가 된 때문일까. 검찰개혁이 문제가 아니라 판사·변호사 등 법조계 전체의 대반성과 수술이 없이는 한국 사회는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수재들만 골라 법조문만 외우게 했으니, 어떤 창의가 샘솟겠는가.
현재 좌우정객들의 주류는 법조출신이거나 운동권출신이다. 이들이 서로 이익집단이 돼 당쟁과 거래를 일삼는 가운데 녹아나는 것은 국민들과 기업인들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해방과 더불어 남한 사람들은 남쪽에 있었다는 이유로 너무도 쉽게 자유민주주의라는 행운을 얻었고, 북한 사람들은 북쪽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산사회주의라는 불운을 맞았다.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대륙에 연결돼 있었던 북한은 쉽게 공산주의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조선왕조(전제주의) 사회에 익숙하던 북한은 전체주의 사회에 동화돼 버렸다.
너무 쉽게 얻은 자유는 항상 쉽게 잃어버릴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산업화세력 대 좌파운동권세력의 대결장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은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이요, 주인이 될 것이냐 노예가 될 것이냐의 기로이다. 남녀노소가 모두 참가하는 시위를 통해 한국은 지금에야 프랑스혁명과 같은 시민혁명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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