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범죄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56)씨가 20년 넘게 복역 중인 부산교도소에서는 1급 모범수로 분류된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부산교도소에 따르면 이씨는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돼 이듬해 10월23일부터 24년째 부산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부산교도소에서는 무기수들이 많아 그는 다른 수용자들과 함께 혼거실에서 생활했다.
이씨는 수감생활 중 한 번이라도 규율을 어기거나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동료 수용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평범하게 살아 왔다고 교도소 측은 전했다.
특히 수용자들은 생활 평가에 따라 1∼4급(경비처우급)으로 나뉘는데, 그는 평소 모범적인 생활로 1급 모범수로 분류됐다고 교도소 관계자는 말했다.
이 관계자는 “1급 모범수인 이씨가 무기징역이 아닌 일반 수용자였다면 가석방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형법에 따르면 무기수라도 개전의 정이 현저한 때에 20년 이상 복역하면 행정처분으로 가석방될 수 있지만, 이씨는 혐의가 중해 검토나 심사 대상에 올리지 않았다고 교도소 측은 전했다.
그는 수용생활 초기부터 꾸준히 작업장에서 노역해 가구 제작 기능사 자격을 취득했고, 교정작품 전시회에 출품해 입상한 경력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의 1급 모범수 수감생활과 관련,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국내외 사례를 보면 연쇄살인범 중에서도 보통 때 사회적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많아 주변에서 ‘어떻게 저 사람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까’하고 놀라는 일이 잦다”며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평소 이씨는 교도관이나 주변 수용자에게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교도소 측은 경찰의 수사 접견 후에서야 그가 화성 연쇄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한 관계자는 ”이씨가 화성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고 교도관들은 물론 다른 수용자들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부산교도소는 경찰 수사 접견과 언론 보도 이후 그를 독방으로 옮겨 수용한 상태다.
교도소 측은 경찰이 법무부에 협조 요청을 하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경기남부경찰청 인근 교정기관으로 이감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DNA가 화성 연쇄살인 중 3차례 사건의 증거물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그는 1차 조사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실제로 전날 수감 중인 교도소로 찾아온 경기남부경찰청 소속 경찰관들이 DNA 증거를 제시하며 추궁했지만, 되레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전해졌다.
혐의 부인과 관련, 이효민 영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씨가 만약 진범인데도 공소시효가 끝난 연쇄살인 혐의를 부인한다면 24년 넘게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생활했던 것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라며 ”정확한 DNA 증거로 추궁하더라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할 개연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흉악범’ VS ‘모범수’…극단적 이중 성향 양립 가능
심리학자들은 이씨가 진범이라는 가정하에 ”흉악범을 잡고 보면 극단적인 이중 성향을 함께 지닌 이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며 ”이씨는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감형 혹은 가석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 매우 계획적이고 전략적 인물로 추정한다”고 입을 모아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씨가 무기징역으로 복역하고는 있지만,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언젠간 감옥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새 사람으로 변신했을 것”이라며 ”진범이 맞다면 나이가 들면서 예전의 엄청난 범죄 성향을 본인도 잊고 싶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상당히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어서 이번 일로 감정이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진 않을 것”이라며 ”보통 사람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면 심리적으로 견딜 수 없지만, 이씨는 방어능력이 강해 ’그건 절대 내가 한 게 아니야’ 하며 버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웅혁 교수는 ”이씨 범죄를 분석해보면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본인이 우위에 서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며 가학적이고 권위적이며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성격일 수 있다”고 했다.
◆수형자 DNA 정보로 확인…동일인 유력
경찰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이씨로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은 검찰이 2010년부터 관리해 온 수형자 DNA 데이터베이스(DB)에 용의자 DNA 정보가 등록됐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검 과학수사부 산하 DNA화학분석과 관계자는 이날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증거물에서 채취한 DNA에 대검이 관리하는 수형인 DNA DB에 저장된 신원확인 정보 등을 확인해 경찰에 지난 9일 통보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2010년 시행된 ‘DNA 신원확인 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살인과 성폭력 등 재범 위험성이 높은 11개 범죄군 형 확정자의 DNA를 채취해 DB에 등록해 보관하고 있다.

이씨의 DNA 정보는 2011년 10월 채취돼 이듬해 1월 DB에 등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대검 관계자는 “수형인 DNA DB에는 지난달 기준으로 모두 16만9180명의 정보가 수록돼 있고 2247건의 미제사건에 활용됐다”며 “이렇게 확인돼 동일인이 아닐 확률은 10의 23승 분의 1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또 경찰이 채취한 DNA 정보 외에 검찰이 별도로 채취한 이 사건 관련 DNA 정보가 있다고도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대검은 지난해 12월 수원지검의 의뢰로 화성 연쇄살인 중 9번째 사건 압수물인 피해자의 볼펜에서 여성 1명의 상염색체 DNA 정보와 불상의 남성 2명의 Y염색체 등을 검출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볼펜에서 추출된 남성 2명의 Y염색체를 경찰이 채취한 DNA 정보와 비교해 일치하는지 등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다만 Y염색체는 DNA 정보와 정확한 비교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동일인 확인 작업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경호 기자 stillcu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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