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의 한 축인 궁예와 그가 세운 태봉국에 대한 지금의 관심을 대표하는 말이다. KBS 드라마 ‘태조 왕건’(2000∼2002년 방영)에서 주인공 왕건과 대척점에 섰던 궁예는 이런 말들로 과장되고 희화화되었다. 궁예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지식은 드라마가 그렸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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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 철원성 터 내에 남아 있는 석등. |
궁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역사 속 실물로서의 궁예에 대한 관심이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궁예의 태봉국 철원성을 공동발굴하자는 합의가 나오면서다. 철원성이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공동발굴은 분단과 적대의 공간이었던 DMZ를 평화의 공간으로 바꾸는 중요한 사업으로 꼽힌다.
남북관계 대전환의 시점에 주목을 받고 있는 궁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왜 그는 철원을 수도로 삼았을까. 실제 발굴이 이뤄진다면 철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미륵 관심법’, 궁예의 홀로서기(?)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을 구사했다. 왕건이 궁예를 죽인 것은 이런 기괴한 행동을 막아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묘사된다. 흔히 알려진 궁예와 왕건의 권력투쟁은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며 궁예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왕건의 시점에서 쓰인 것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록을 신뢰한다고 해도 이런 행동의 이유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궁예란 인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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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 지역을 표시한 고지도 동여비고. |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 호족들의 간섭을 뿌리칠 만한 세력기반이 약했다. 송악(지금의 개성)을 기반으로 했던 왕건, 사불성(지금의 상주)을 움켜진 아버지 아자개를 둔 견훤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계다. 이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족들과는 다른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갈망이 컸을 것이며, 이것이 미륵, 관심법으로 표출되었을 거란 분석이 가능하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궁예는 896년 처음으로 철원을 도읍으로 정했으나 898년 송악으로 옮겼고 905년에 철원으로 돌아와 국호를 태봉으로 정했다. 이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호족의 근거지인 송악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화를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철원이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북쪽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남쪽으로 진출하기 쉽다는 지리점 이점도 철원에 둥지를 튼 이유 중 하나다. 동·서 양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대규모 개발 피해간 철원성
철원성 발굴에 대한 관심에는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금단의 지역인 DMZ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도성은 살기 좋은 곳에 조성이 되었기 때문에 개발이 손쉽게 이뤄졌다. 특히 현대의 대규모 개발로 인해 고대 도성의 흔적이 온전하게 보존될 여지가 적었다. 서울에 위치한 백제 초기의 도성인 풍납토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철원은 왕건이 송악으로 환도한 뒤 대규모 개발이 이뤄전 적이 없다. 더구나 DMZ가 만들어지면서 개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져 지하에 철원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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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 철원성 터. |
이런 점에서 남북관계 개선으로 DMZ 개발·활용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철원성 유적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이든 개발이 진행될 경우 훼손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 DMZ 내 지뢰 제거 작업이 지뢰를 폭파시키는 방법으로 제거할 경우 땅 속의 도성 유구도 파괴될 수 있다.
◆철원성 인근에서 볼 수 있는 유적·유물은
궁예와 태봉을 떠올리게 하는 하는 철원성 흔적이 만이 아니다.
왕건이 철원에서 생활할 때 머물렀던 집터로 알려진 곳이 전한다. 904년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궁성을 축조했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까지는 당시에 축조되었던 담장 유적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자리잡았는데 ‘여지도서’라는 지리지에는 “향교터는 본래 고려 태조가 궁예에게서 벼슬을 할 때의 구택(舊宅)인데 담장과 그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다. 궁예 혹은 왕건이 공부하던 암자터라는 민간의 구전도 있다.
태봉 왕실 누군가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胎封)이라 전해지는 유적도 철원에서나 접할 수 있다. 왕실 누구의 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재를 이용한 태실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명성산성에는 궁예의 몰락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왕건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 후 궁예는 자신을 따르던 군졸들과 함께 중어성, 보개산성 등을 전전하다 최후에 명성산성에 자리잡고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끝내 군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군졸들이 너무 슬프게 울어 ‘울음산성’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금학산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신체의 장대성을 강조하고 가슴 앞 띠매듭을 표현하는 등 신라 하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 도피안사 삼층석탑은 865년 도선국사와 향도들이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특징을 잘 보여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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