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십리벚꽃길 옆 ‘적이재’/60대 부부 은퇴 후 고요히 기거/사람·자연과 함께 하는 삶 가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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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살았던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의 마루가 있고 텃밭과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을 떠올리며 우리나라 민가 혹은 한옥을 모티브로 하게 되었다. |
새해가 밝은지도 한달여 지났다. 2018년 무술년은 마치 부드럽고 온화하게 켜지는 품질 좋은 조명처럼 조용히 밝았다. 작년에 워낙 큰 물줄기가 땅과 하늘을 덮을 듯 몰아닥쳤기 때문이었는지 올해 신년 벽두는 유난히도 조용하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조용한 아침에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이 있다. 남들처럼 차를 달려 해가 떠오르는 바닷가로 갈 정성도, 산 정상에서 꽁꽁 언 발을 동동 굴리며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볼 용기도 없는지라, 다만 집에서 이미 하늘 높이 떠오른 새해의 태양이 보내주는 따뜻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한 해를 열 뿐이다.
햇살이 좋은 아침 무엇이라도 새해의 첫날 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을 찾아보다가 좋은 글을 종이에 적어보는 일을 했다. 멋진 글귀를 찾아 새해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 삼는 것은 좀 오래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손으로 직접 쓴 글을 천천히 읽으며 몸속으로 녹여서 쌓아놓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 특히 대권 주자들이 흔히 하듯 큰 붓을 휘두르며 휘호를 남길 재주는 없는지라 그냥 조금 좋은 종이를 꺼내서 몇 글자 적었다. 올해는 다산 정약용의 산문 몇 편을 꺼내서 읽으며 써봤다. 정약용의 글이야 내가 새삼 찬양하고 평가할 필요도 없는 명문이지만, 특히 그중 두 편의 산문이 눈에 들어왔다.
한 편은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이고 또 한 편은 ‘어사재기(於斯齋記)’라는 글이었다. ‘수오재기’는 정약용이 큰형 서재의 이름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가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 차분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써낸 글이다. 언제 읽어도 아주 담담하면서도 처연해진다.
또 한편 ‘어사재기’라는 글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지니지 않은 사물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해 자세히 보고는 ‘이것’이라고 한다. ‘이것’이라는 것은 이미 얻어서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손에 넣은 것이 내 바람을 채우기에 부족하다면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그것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근심거리다. 지구는 둥글고 땅은 사방으로 평평하니 하늘 아래 내가 앉아 있는 자리보다 높은 곳은 없다. 그러나 백성 중에는 곤륜산에 올라가고, 형산과 곽산에 올라가며 높은 것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 이미 가버린 것은 뒤쫓을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하늘 아래 지금 누리고 있는 처지처럼 즐거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 중에는 가마와 말을 다 없애고 전답을 탕진하며 즐거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평생 동안 미혹되어 오직 ‘저것’만을 바라보고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지가 오래다.” (뜬세상의 아름다움/ 정약용 저, 박무영 옮김/ 태학사)
이 글은 정약용이 청해 절도사인 이민수의 서재 이름에 설명을 붙인 글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 즉 먼 곳을 바라보고 머나먼 그리고 불확실한 기대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삶에 대해 정약용은 이야기한다. 지금에 만족하고 현실을 긍정하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새해의 다짐이기도 하다.
# 교감하며 온기를 나누다
‘온도’는 따뜻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한겨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입김처럼 훅 불어오는 온기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아파트라면 좋은 난방 시스템이 알아서 온도를 맞춰 주고 일반 주택도 미리 보일러를 설정해 두면 대부분 바깥보다 훨씬 포근하고 안온해서 집에 돌아왔음을 그 온기로 실감하곤 한다.
예전에 살던 집들은 무척 추웠다. 바닥에 뜨끈한 온돌이 있긴 했지만 골고루 다 데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랫목만 데워주곤 했다. 칼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창틈과 문틈, 그리고 단열이 되지 않는 얇은 벽은 추위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늘 겨울은 춥게 사는 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머리맡에 떠놓은 스테인리스 대접의 자리끼는 밤새 꽁꽁 얼어붙었고, 안방을 가기 위해 마루를 건널 때는 발바닥이 얼어붙는 듯해서 뒤꿈치로 쿵쿵거리며 뛰어넘어가야 했다.
춥게 집에 있다 아이들과 놀기 위해 집을 나서면 바람은 매서워도 집 안보다 오히려 덜 추운 것 같았고, 양지바른 동네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집보다 훨씬 따뜻했다. 해가 잘 드는 남향받이 하얀 담 앞에는 벌써 친구들이 모여서 온몸으로 햇살을 가득 받은 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햇볕에 데워진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지고 추위는 이미 어디론가 멀리 넘어가 버렸다. 오후 긴 시간 햇볕이 데운 그 벽이 주었던 온기는 보일러나 온풍기가 불어주는 따뜻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겨울이 되면 그리워지는 그런 온기는 건축을 하며 늘 책상머리에 두고 보는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다.
오래된 옛집을 보러 다니며 그때 느꼈던 온기를 다시금 떠올리곤 한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겠노라며 다니기 시작했다. 오래된 집들의 구성이나 나무를 결구한 모양, 그리고 여러 가지 마감재료를 사진 찍고 메모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한 장이라도 더 찍어서 남기기 위해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바쁘게 돌아다니고, 다 보았다 싶으면 ‘그다음’ 하며 휙 하고 장소를 옮겼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는데, 다닌 만큼 어디 가서 떠들 정도로 지식이 모였지만 어느 순간 그런 지식이 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관점이나 대상이 달라졌다. 오래된 집 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 코로 스르르 들어오는 오래된 문의 창호지 냄새, 그리고 뚫어진 창호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집 냄새, 흙벽 냄새, 그리고 마룻바닥이나 기둥을 손으로 쓸어볼 때 느껴지는 매끈하면서도 눅진한 오래된 나무의 결, 그리고 집의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소리,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 등등 오감을 자극하는 그 자극들이 주는 안온함, 그리고 마루에 햇살이 슬그머니 들어서 기둥에 빛을 비춰주며 나뭇결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 가득 번지는 온기…. 오래된 집이 나에게 주는 진정한 가르침은 그런 것들이었다. 옛집들이 품고 있는 온기는, 직접적으로 보거나 만나지는 않더라도 오랜 시간 그 집에서 사람들이 살며 부대끼며 닳아온 삶의 흔적을 경험하고 그것에 교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어떤 연구소에서 유인원의 운동을 통제하는 뉴런에 전극을 설치하고 전기신호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유인원이 먹이를 집으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뉴런이 활성화되어 소리가 나게 되어 있었다.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실험자가 땅콩을 짚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마치 스스로 손을 뻗을 때와 똑같이 유인원에게 연결된 실험장치에서 소리가 났다. 실험장치가 고장이 난 것인 줄 알았는데, 얼마 후 실제로 유인원의 뇌가 마치 실험자의 뇌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공감하는 뉴런을 ‘거울 뉴런’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
인간은 거울 뉴런을 다른 동물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거울 뉴런의 메커니즘이 타인의 내면세계로 직접 통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세상은 능률로 움직이고 잘난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협력할 줄 알고 교감을 나눌 줄 아는 것이다.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몸집이 아주 크지도 않고 힘도 가장 강하지 않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인간의 특출한 두뇌 능력과 더불어 서로 협력하는 법을 터득한 덕분이라고 한다.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인 정현종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람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둘 이상의 또 다른 세계를 연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 대한 긍정이 깔려 있을 때 그런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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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히 머물며 우러른다는 의미의 하동 적이재(寂而齋). 박영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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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리벚꽃길이 내려다보이는 집은 지리산 한가운데에 산과 산이 마주 대하고 있는 사이로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물길이 유장하게 흐르는 중간에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라는 하동의 십리벚꽃길은 하동 화개장터에서 시작해서 쌍계사까지 벚꽃이 터널을 만들며 이어지는 풍경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정작 벚꽃이 피는 봄이면 그 근처로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다.
벚꽃이 길을 다 덮고 피어 있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꾸룩거리며 벚꽃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은 그 많은 인파에 끼어들어 벚꽃 터널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바람에 작은 꽃잎들이 날리는 중이었다. 연분홍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바닥에 깔려 있는 모습을 보며 몽환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이 만발해 있을 때는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지만 벚꽃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한적한 장소로 바뀐다.
그 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을 한 채 지었다. 한철 벚꽃도 아름답지만 둘러싼 산의 연봉이 시원하고 아름다운 이 집의 이름은 적이재(寂而齋)이다. 적이재라는 이름은 화엄경에서 따온 건데 ‘고요히 머무르며 우러른다’라는 뜻이다. 집의 이름처럼 정년을 맞이한 가장이 서울에서의 살림을 걷고 부인의 고향인 하동으로 내려가서 고요히 머물게 된 집이다. 집터는 지리산 한가운데에 산과 산이 마주 대하고 있는 사이로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물길이 유장하게 흐르는 한중간이다. 집의 주인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60대 부부이고 자녀들은 분가했다가 종종 찾아온다. 부인의 고향인 동네라 처가 일가와 친구들이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낯선 곳에서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경우와는 달리 새로 집을 짓는 데 사뭇 여유가 있었다.
주인은 오랫동안 도시의 거의 같은 형식의 아파트에서 별다르게 신경 쓰는 일 없이 편하게 살아왔는데, 집을 짓기로 마음먹은 후 어린 시절 살았던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의 마루가 있고 텃밭과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을 그리게 되었다. 자연스레 집의 외관은 우리나라 민가 혹은 한옥을 모티브로 하게 되었고, 예산의 한계로 인해 구조는 가장 일반적인 경골목구조 형식을 택하기로 했다. 각종 수집품과 오랜 살림들이 한정된 규모의 집 안에 적절히 수납되도록 하고, 늦은 공부를 시작한 부인의 공부방을 어머니방 가까이 두고, 2층은 ‘인연의 방’으로 정해 비워 두고 친척이나 자녀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 같은 개념으로 독립시키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집 안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궁리보다, 울타리 나무로 남천, 사철나무, 화살나무, 홍가시 등등 무엇을 심을지, 축대는 어떤 모양으로 쌓을지, 텃밭과 저장고는 어디로 할지, 감나무와 밤나무 건사는 어떻게 할지가 집 짓는 내내 더 큰 관심사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은 결국 땅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생경한 구조물을 떡하니 던져놓고 집을 다 지었다고 하는데 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건축의 온도는 무엇이고, 삶의 온도는 또 무엇일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이하던 밥 짓는 연기처럼, 어머니가 끓이는 된장국 냄새처럼, 가꾸지 않아도 편안한 마당처럼, 가족들이 아랫목에 발을 맞대고 하릴없이 떠드는 말의 온기처럼,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교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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