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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23번의 주인공 마이클 조던, 우리처럼 늘 다른 길을 동경했던 인물

입력 : 2016-07-02 09:20:00 수정 : 2016-07-01 14: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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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23번의 주인공…마이클 조던(5)

마이클 조던은 농구, 아니 스포츠 영역에서 분명 신이였다. 하지만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명성과 돈 등 부러울 것이 없던 그였지만 '야구 선수'라는 또다른 꿈을 동경했다.

주전으로 뽑히지 못해 서러움에, 아버지의 사망에 울었고 하던 일을 그만 뒀다가 다시 돌아온 것 등등을 볼 때 마이클 조던도 사람이었다.

△작은 키로 외면 받았던 꼬마 조던

마이클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주 윌밍턴의 레이니 고등학교 때 작은키로 설움을 맛봤다.

레이니 고 코치는  조던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작은키(11학년 때 178cm)를 이유로 번번이 주전명단에서 빼 버렸다.

훗날 조던은 인터뷰를 통해 "집에 가자마자 대성통곡했다"며 당시의 아픔을 표현한 바 있다.

이후 조던을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키도 쑥쑥 자라 팀 주전, 대학에 특기생으로 진학하게 됐다.

△'가지 않은 길'이기에 더욱 가고 싶었던, '야구'

1994년 2월 15일 마이클 조던을 취재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250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아닌 야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

조던이 야구로 돌아선 것은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제임스 조던)가 뜻밖의 일로 죽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던은 1993년 7월 고속도로에서 10대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마이클 조던 광팬이었던 강도는 '조던의 신발'을 사기 위해 누군지도 모르고 제임스 조던에게 총질했다.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한 마이클 조던은 '은퇴'를 선언,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조던이 택한 직업은 프로야구 선수. 1993년 10월 6일 조던은 "농구계를 떠나겠다"고 폭탄선언한 뒤 메이저리그 화이트삭스와 프로계약을 맺었다.

조던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아들에게 '야구와 농구'모두를 가르쳤다. 퇴근후 마이클에게 볼을 던져주며 배트를 휘두르게 했다.

마이클 조던도 청소년기 때 야구와 농구를 놓고 고민한 적도 있다.

그에게 야구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시 '가지않은 길(The Road Not Taken Two roads)'이 말했던 '가보지 않아 더욱 가보고 싶었던 길'이었다.

하지만 30살 넘은 농구황제에게 야구는 이미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트리플A로 떨어진 뒤 다시 더블A로 밀려났다.

1994시즌 127경기에 나섰던 조던은 타율 0.202, 3홈런.51타점, 30도루, 51볼넷, 114삼진을 기록한 채 1995년 3월9일 농구 복귀를 선언했다.

조던의 예를 통해 우리는 아무리 뛰어난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초와 감각 토대를 닦을 무렵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결코 프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게 됐으며 '마이클 조던도 못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 기쁨(?)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꼈다.

△3번의 은퇴와 2번의 복귀

마이클 조던은 1993년 10월 농구계 은퇴(1차은퇴)했다가 1995년 2월 복귀, 또 다시 시카고 불스에게 NBA3연패를 선물했다.

조던은 97~98시즌 우승 뒤 은퇴할 뜻을 내비쳤으며 1999년 1월 14일 공식은퇴(2차은퇴)를 선언했다.

2000년 워싱턴 위저즈 공동구단주가 된 마이클 조던은 2001~2002시즌을 맞아 코트로 복귀(두번째 복귀)했다.

이후 2002~2003시즌까지 두차례 더 코트를 누빈 조던은 평균 20득점 이상과 만 40세에 43점을 집어 넣었지만 탄력 등에서 예전만 못함을 절감하고 2003년 2월 21일, 세번째이자 마지막 은퇴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사진=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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