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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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핀테크 산업의 현주소와 과제. 사진=우리금융경영연구소 |
IT·금융 융복합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지만 국내 금융산업의 준비는 거의 전무하다. 이 때문에 늦기는 했어도 미래를 내다보고 유망한 사업영역을 선택해 이에 역량을 집중, 이제라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15일 금융권과 정보기술업계 등에 따르면 핀테크 기업에 대한 글로벌 투자금액은 2008년 9억2000만달러(원화 약 9934억원)에서 2013년 29억7000만달러(3조2071억원)로, 최근 5년 사이에 3배 이상 급속히 늘어났다.
사업영역별 투자비율을 살펴보면 2008년 이후 지급결제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대신, 2013년에는 금융소프트웨어와 금융데이터 분석 부문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전략연구실 연구위원은 “향후 핀테크 산업의 빠른 성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시중은행과 업계를 향해 분발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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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핀테크 산업의 현주소와 과제. 사진=우리금융경영연구소 |
핀테크 사업영역은 ▲지급결제 ▲금융데이터 분석 ▲금융소프트웨어 ▲플랫폼 등 크게 네 분야로 나뉜다.
지급결제는 이용이 간편하면서도 수수료가 저렴한 지급결제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지급결제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금융데이터 분석이란 개인과 기업고객과 관련된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의미한다.
또 금융소프트웨어는 보다 진화된 스마트기술을 활용해 기존 방식보다 효율적이고 혁신적인 금융업무 및 서비스에 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함을 뜻한다. 플랫폼은 전 세계 기업과 고객들이 금융기관의 개입 없이 자유롭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거래기반을 조성함을 이른다.
미국의 벤처캐피탈 전문기관(CB Insights) 조사 결과, 글로벌 핀테크 사업영역별 투자비중은 지급결제가 지난 2008년만 해도 무려 70%에 달하는 등 절대적이었으나, 2013년 28%로 절반 이하로 대폭 축소됐다. 그 자리를 금융데이터 분석과 금융소프트웨어, 플랫폼이 차지했다.
지난 2013년 기준 금융데이터 분석 및 금융소프트웨어는 각각 29%씩, 플랫폼은 14%로 5년 전과 비교하면 사업영역을 2~3배 가까이 확장했다. 이들 세 분야가 전체에서 72%를 점유하면서 5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핀테크에 후발주자로 나선 만큼 성장세가 둔화된 지급결제시장에 뛰어들어 글로벌 선두 IT 공룡기업들과 경쟁할 게 아니라, 확대되고 있는 금융데이터 분석과 금융소프트웨어, 플랫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뒤늦게 국내 대형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송금 지급결제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나, 해외와 같은 핀테크 기업들의 서비스 상용화 실적은 전혀 없다. 글로벌 벤처기업 소개사이트인 벤처 스캔너(Venture Scanner)에 의하면 국내 핀테크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374개 회사를 보유한 미국이나 57개사의 영국처럼 핀테크 강국과 비교할 것도 없이 ▲싱가포르 15개 ▲중국 10개 ▲홍콩 7개 ▲일본 4개인 것과 대조된다. 이는 국내 대형 ICT 기업들이 기존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지급결제서비스 영역을 좀 더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춘 까닭이다.
한국은행은 ‘국내외 비금융기업의 지급서비스 제공현황 및 정책과제’에서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전자방식 지급채널에 대한 고객의 참여와 이용을 확대하면서 지급서비스 이외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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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혁신경제 업무보고. 자료=금융위원회 |
현재 국내 핀테크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는 요구가 IT업계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고 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에 대한 소유·지배를 금지하는 ‘금산분리’(金産分離) 원칙상 지급결제기능을 은행만이 가지고 있는 국내 금융환경 하에서는 IT기업이 아무리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더라도 핀테크 사업을 영위하는 데 업권간 칸막이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전면적 규제완화는 산업자본에 금융자본이라는 라벨을 붙여주는 조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모든 자금중개에 현재 금융과 같은 공적인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향후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 전문가는 “특정 단편기술로 무장한 유사금융회사들이 자신들의 기술이 어떻게 큰 그림과 접목할 수 있는지 제대로 고민하지도 못하면서 규제철폐만을 요구하고 있다”며 “규제완화로 인해 얻게 될 약간의 혜택보다는 혼란이 훨씬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전면적인 규제완화는 말처럼 쉽지 않다. 정부가 개정안을 차관회의와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올려도 소관 상임위원회 및 법안소위 등 국회의 입법 논의절차를 준수해야 하고, 이후에도 본회의 표결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입법예고와 이해당사자간 공청회를 통해 의견수렴도 밟아야 한다.
그런 만큼 시일이 오래 소요되는 정부의 규제완화만 바라보며 찬·반 논란의 여지가 큰 ‘금산분리’를 주장할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핀테크 출발이 많이 늦은 까닭에 현행 법체계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 재빨리 변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문병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사실 우리나라가 법률의 양만 놓고 볼 때 금융규제의 양이 다른 나라보다 과도한 것은 아니다”면서 “미국은 금산분리, 일반인의 크라우드펀딩 투자 금지 등 금융질서와 투자자보호를 위해 다른 나라보다 엄격하지만 전 세계 금융산업과 핀테크를 주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금융규제의 예측가능성에 있다. 유럽과 일본은 크라우드펀딩을 허용하고 금산분리를 채택하지 않으나, 미국보다 핀테크에 뒤지고 있다. 원인은 미국의 규제가 예측가능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규제가 복잡해도 명확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새로운 비즈니스가 허락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IT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은 혁신적인 핀테크 산업을 리드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규제는 예견하기가 어렵다. 포괄적인 금지 규정이 많고, 법률상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규제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여기에 심각한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금융기관의 책임을 종전보다 훨씬 엄중하게 추궁하는 경우도 자주 벌어진다.
특히 공인인증서는 명확한 법률적 근거 없이 금융당국이 10여년 동안 강제했다가 법 개정 없이 지난 2013년 5월 폐지했다. 그러나 온라인 구매 시에는 공인인증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정작 금융기관은 의무적으로 쓰고 있다.
금융당국도 이 같은 포지티브(Positive, 허용되는 사항을 규정하고 나머지는 금지) 방식의 금융법규 및 체계가 시장 역동성 발현에 제약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인정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사전규제를 최소화하고 책임부담을 명확히 해 규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이라며 “IT와 금융의 융합 지원을 위한 규제개선과 함께 소비자보호 및 정보보안을 동시에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 금융권, 달콤한 규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때
정부는 15일 ‘역동적 혁신경제’를 통해 핀테크 산업에 정책금융 2000억원을 투입함으로써 융합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핀테크 지원센터’를 설치해 창조경제혁신센터와 연계하며 스타트업의 ‘창업→서비스개발→출시’까지의 전(全)과정에 대한 행정·법률 자문, 금융회사 연계, 자금조달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핀테크 지원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문제는 은행권이 이런 변화를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철밥통 속에 안주하고 있는데 정부의 이런 정책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생색내기식 변화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전문가는 “은행의 경우 앞으로 생태계전반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순식간에 닥쳐오기 전에 혁신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현실적으로 법규제를 뜯어고치는 시간보다 은행들이 정신차리고 환골탈태해 스스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SBC 등 해외 주요 은행들이 최근 금융당국과 협력해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흐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당국과 금융권은 이 같은 규제 완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개인정보유출로 잃어버린 금융소비자들의 신뢰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김슬기 기자 ssg14@segye.com
<세계파이낸스>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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