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자체조립 시작에 자극
美 지원… 설계도 본떠 복제 1976년 2월 미국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 장의 위성사진을 건넸다. 북한 전차 공장의 현장사진이었다. 공장 인근 부지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들은 모두 북한이 자체 조립한 전차들이었다.
박 대통령은 진상 파악을 지시했고,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자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군에게 북한의 전차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북한 전차에 대응할 전력이 없어 6·25 발발 사흘만에 서울을 북한에 넘겨줬다는 아픈 기억이 정부와 군내에 넓게 퍼져 있었다. 언젠간 전차를 국산화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때를 기다리던 터였다. 남한에게 전차 전력 강화가 숙원이었다면 북한에게는 유엔군의 전투기가 공포의 존재였다. 북한이 6·25 전쟁 이후 곳곳에 비행장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북한 전차 공장에 놀란 정부는 미국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2월 미국산 M48A1 전차가 부산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곧바로 울산 현대조선소 공장으로 옮겨진 이 전차는 이후 국내 최초 조립 전차인 M48A3K로 변신했다.
국내 조립이라고는 하지만 M48 패튼전차의 개량형인 M48A3의 설계도면을 보며 미국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만든 복제품이었다. 모델명에는 한국을 뜻하는 ‘K’가 붙었다. 이어 M48A5K도 탄생했다.

숙원사업이긴 했어도 이를 당장 실현시킬수 있는 수단이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국가 재정이나 기술 수준은 전차 개발에 턱없이 부족했다.
지원을 요청받은 미국도 “한국의 기술 수준이 아직 전차 제조에 미치지 못한다”며 대신 M60 전차를 수입할 것을 제안할 정도였다.
미국과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정부는 유럽의 전차 강국인 독일에 가능성을 타진했다.
한국 건설사의 중동 진출 등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조선과 제철 등 중공업의 기반이 조금씩 마련되는데 따른 자신감에서 비롯된 일종의 ‘미국 떠보기’였다. 결국 이러한 제스처는 미국으로하여금 기존 입장을 바꿔 M48 개조 지원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정부가 전차 제작에 직접 나서기로 한 데는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됐다는 점이다.
미국은 M48A1 전차를 한꺼번에 수십대씩 한국에 보내줬지만 대외군사판매(FMS) 형태의 지원이라 대미 부채는 커져만 갔다. 더욱이 M48A1 운용에 필요한 부품조달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모든 수리부품을 미국에서 수입하다보니 전차 가격보다 부품값이 오히려 커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발표한 지미 카터 미 행정부가 미군이 빠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군 기갑 전력을 보완한다며 1977년 M48 전차 개조사업을 승인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M48A3K의 조립 양산은 6·25 전쟁 이후 미군이 남긴 M4A3E8 ‘이지에이트’로 유지되던 한국군 전차 전력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안두원 기자 flyhig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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