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으로 공기를 물들이는 연기자…나이 및 직업보다는 인물이 느꼈을 법한 ‘고독’과 ‘사랑’에 신경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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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뜨거운 바다' 배우 이명행 |
2011년 초연, 2012년 앙콜 공연 이렇게 2차례 관객들과 만났고 공연 막바지엔 남산예술센터 공연 전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무대 밖에서 마주치는 이명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작 주인공이었음에도)너도 공연 보러왔니” 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웃기도 했다는 그. 인터뷰로 만나본 그는 분명 무대 위 얼굴과 달랐다. 단순히 극 중 캐릭터에 빠져들게 하는 게 아닌 배우의 감성으로 무대 공기를 물들이는 연기자였으니 말이다.
▣ ‘뜨거운 바다’에 뛰어들기 전
지난 5월, 대형 뮤지컬이 아닌 대학로 연극에 배우 4명 뽑는데 500여명이 지원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스타 캐스팅에 연연하는 공연계를 뒤엎듯이 지원한 모든 배우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대규모 오디션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일본 현대연극사의 신화적 존재, 재일교포 2세 故츠카 코헤이(김봉웅)의 타계 2주기를 맞아 기획된 연극 ‘뜨거운 바다’에 쏠린 관심이다.
이명행은 뜨거운 오디션을 통과해 ‘기무라 덴베이 부장형사’역을 꿰찼다. 극중 우두머리로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이다. 사실, 극단 마방진의 고선웅이 연출하는 작품에 같은 극단의 배우 이명행이 주인공으로 낙점됐다고 했을 때 ‘이미 예정된 수순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다.
“강렬한 포스터 자체가 배우들의 의욕을 불태웠어요. 그래서 오디션에 응시했죠. 한국공연예술센터, 이다엔터테인먼트, 원더스페이스 관계자분들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공정하게 오디션을 봤어요. 저 뿐 아니라 마방진 소속 다른 배우도 오디션을 봤어요. 다행이 제가 합격을 했는데, 이제 묵중한 책임감만 남은 것 같내요.”
이씨는 2011년 방영된 ‘MBC 스페셜’을 통해 재일교포 2세 故츠카 코헤이(김봉웅)연출가를 알게 됐다고 했다. 대본을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창작법(구치다테)으로 유명한 극작가 겸 연출가이다. 연극 ‘뜨거운 바다, 동경에서 온 형사’는 27년 전 1985년, 전무송, 최주봉, 강태기, 김지숙 등 4명의 배우가 서울의 문예회관(현재의 아르코 대극장)에서 공연해 큰 화재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우연히 ‘MBC 스페셜’을 보게 됐어요. 연출 및 작품에 대해 잘 모른 채 TV에서 보여지는 공연 영상을 본거죠. 처음엔 단편적으로 멋있다. 재미있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 뒤 고선웅 연출에게 ‘츠카 코헤이씨가 형님과 비슷한 분인 것 같다’ 라는 문자를 보냈어요. 그런데 1년 뒤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됬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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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뜨거운 바다' 배우 이명행 |
▣ ‘뜨거운 바다’ 한 복판에서
그의 말마따나 고선웅은 츠카 코헤이와 닮아 있다. 인간을 사랑하고, 실패할지언정 결코 비겁하지 않다. 연극적 요소를 최대한 살린 발성과 아이러니한 연출 터치들이 그러하다. 배우가 가진 것을 잘 뽑아내는 연출가인 점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뜨거운 바다=고선웅식 연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건 아니다.
“작가가 해 놓은 게 워낙 크고 단단한데 그걸 연출님이 어떻게 풀어낼지가 관건인거죠. 최대한 선생님의 작품답게 만들고 싶다고 했죠. 이 작품이 고선웅식 대본만은 아닌 이유이기도 하구요. 물론 형님 역시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 하셨죠. 게다가 이번 작품은 츠카 코헤이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기리는 공연이에요. 큰 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씨는 초연 때 같은 역할을 했던 배우 전무송(‘뜨거운 바다’ 예술감독)씨가 한마디 해 준 것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고 전했다.
“얼마 전에는 전무송 선생님과 술 자리가 있었어요. 작가 선생님이 좋아하신 두부김치를 시켜놓고 마치 앞에 츠카 선생님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하셨죠. ‘츠카야. 네 작품이 곧 올라간다. 잘 되길 빌어다오’ 말씀하시는데 마치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또, 초연때와 같은 제목인 ‘뜨거운 바다’로 무대에 올라 전통성도 더 가미된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에요. ”
▣ ‘뜨거운 바다’는 ‘하이 필링’(high feeling) 연극
한국공연예술센터 테마별공연예술시리즈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 ‘뜨거운 바다’는 아타미 해변에서 매춘부가 살해당한 사건을 취조하기 위해 모인 세 명의 형사와 한 명의 용의자 이야기다. 시종일관 황당한 웃음 코드로 진행되다가 각 배역의 사연과 상처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내달리는 것인지 초집중하게 되는 게 특징.
“고조되고 격렬한 그런 연극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이필링을 유지해요. 인간군상의 얽히고 설킨 지점을 보여줘요. 그 와중에 코믹함이 있죠. 배우 입장에서는 엄청난 트레이닝을 요구해 힘든 것도 사실이에요. 마지막엔 뜻 모를 슬픔과 감동이 있어요. 배우가 연극 속에서 형상화시키는 지점 거기까지가 힘든거죠. 그걸 이겨내면 관객이 볼 때는 멋 있는 부분도 분명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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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뜨거운 바다' 배우 이명행, 마광현, 김동원, 이경미 |
이씨는 ‘’뜨거운 바다‘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이 작품만큼은 정말 ‘몰입’이 중요해요. 황당무계한 대사들을 막 쏟아부어 배우를 치닫게 하는 매력이 있어요. 연습하며 재미있고 스스로 감동도 받긴 하지만 쉽지만은 않죠. 표면적으로는 맥락없이 터져나오는 대사와 행동 같지만 알고보면 밑에 깔려있는 게 상당히 많아요. 대사 하나 하나가 말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닌 거죠. (숨겨진 맥락을)자꾸 끄집어내는 과정이 필수죠. 처음에 관객들은 당혹스런 설정에 ‘뜨아’ 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내요 ”
▣ ‘롤러 코스터’ 같은 형사 기무라 덴베, 그리고 배우 이명행
작품의 배경인 수사실 안의 광경은 형사가 용의자를 위협적으로 취조하는 보통의 수사실의 그 것과는 다르다. 형사들의 사전 각본에 의한 광기 어린 수상한 취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극중 부장 형사는 ‘롤러 코스터’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인물.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가장 파워풀한 역할이에요. 세 인물을 마무리 시켜줘 권위 있고 윤리적인 형사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권위가 뚝 떨어진 채 멍청한 남자로 변해있어요. 징징대는 바보 혹은 똘아이 같기도 해요. ‘제 왜 저러는거야?’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괴팍한 성격 같아 보이기도 해요. 롤러코스터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끝도 없이 상승하고 추락하는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이씨가 신경 쓰는 점은 뭘까.
“기무라 덴베 형사를 표현하기 위해선 ‘능청’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텍스트 자체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중구난방식으로 진행되요. 겹이 많아 소화하는게 쉽지 않은데 흐름을 타면서 놀아야 하는 게 중요하죠. 색깔을 예로 들면 빨간 색을 보여주다 갑자기 파란 색을 보여주는 식이죠. 그런데 두가지 색이 겹쳐보인다면 ‘능청’을 제대로 떨지 못한 거죠. 이게 잘 된다면 관객들이 재미있게 받아들이실 것 같아요. 그 뒤에 결국 ‘슬픔’이란 감정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구요.
전 맡은 인물의 나이 혹은 직업 같은 것을 생각하기 보다 장면 장면에 더 신경을 써요. 감정의 고저가 많은 인물이다보니 인물이 느꼈을 법한 ‘고독’과 ‘사랑’에 더 신경썼어요. 그런게 관객들에게 느껴지고 채워지다보면 캐릭터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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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뜨거운 바다' |
▣ 이 남자와 나눈 대화. 황당하다, 유쾌하다! … 그리고 … 어?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이명행은 ‘왜 내게 그런 질문을?“이란 표정으로 답했으며, 인터뷰에 온전히 집중하기 보다 까페 안을 지나가는 지인 한명 한명에게 아는 체를 했다. 급기야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있다며 잠시만 시간을 달라며 자리를 뜨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인터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보여줄 황당한 형사 기무라 덴베가 눈 앞에 그려질 정도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 이제 한국 들어온 후배인데 정말 오랜만에 만난거거든요.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
-실제 성격은 어떠세요?
“고교시절엔 시를 쓰는 남학생이었고, 대학 전공도 불문학(중앙대)이에요. 지금의 부인에게 글을 써서 보낸 적도 있구요. 수다가 많은 성격은 아니에요. 어쩔 때 보면 누르고 있는 것 처럼도 보인대요. 지금 보니 기무라 덴베같은 롤러코스터 성격 같기도 하내요.”
-뭘 잘 하는 배우에요?
“내 입으로 장점을 말하라는 말이세요? (한 참을 고민하더니) 다른 배우들과 달리 목이 잘 안 쉬는 배우에요. 어! 그런데 이번엔 쏟아붓는 대사가 많다보니 목이 쉬었내요.(?)”
-고선웅 연출은 어떤 배우라고 말해요?
“말 안해주시던데요. 음...‘평범하지만 밉상은 아니다. 배우는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관객들이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얼굴이다’는 말은 해 주셨내요. 최소 거부감은 없는 얼굴이다는 의미죠.”
-아이 아빠시죠. 남자배우들은 아빠되면 달라지기도 하던데. 언제 결혼하셨어요?
“어. 제가 결혼 시기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2007년에 마방진에 들어갔는데... 아 결혼은 2009년에 했내요. 아빠가 된 뒤로 달라진 점은 그냥 흘려들었을 내용들이 가슴이 훅 들어온다는 점. 특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이에 관한 게 나오면 정말 가슴에 와 닿죠. 영화 ‘연가시’에서 ‘아빠가 빨리 갈게’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훅 빠져들었습니다.”
-3천배를 올린 배우라는 소문도 있던데.
“어. 저도 그 소문은 들은 것 같긴 한데. 저는 아닌데요. 108배에서 500배까지는 해 봤어요. 그런데 소문의 주인공은 누구죠? (장난스런 표정으로 돌아가더니)아. 다시 답 해야겠내요. 몸이 열이 나면서 자세가 곧아지고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3천배를 올린 배우는 제가 맞구요.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절을 올렸습니다(웃음)”
-그럼 연극배우로서 계속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전 배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배우의 길이 내 길인가? 이런 고민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극단 체질도 저와 잘 맞구요. 하지만 이번이 고비에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역할이 상당히 커졌거든요.”
-고비까지 왔어요?
“캐릭터가 만만치 않아요. 전 이해가 안 가면 (연습 때)이만큼도 못 나가요. 맥락모르고 부딪치는 배우도 장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알고 부딪치는 것이랑은 다르잖아요. 지금까지 어지간한 작품은 다 이해가 됬는데 이번은 쉽지가 않내요. 알 것 같다가도 다른 날 보면 아니어서 ‘띵’ 소리가 나고.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과정을 많이 겪었어요.“
-그렇다면 ‘뜨거운 바다’가 배우님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겠내요
“(기대했던 맥락의 대답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뜨거운 바다’ 작업 한 뒤 둘째가 생겼어요. 주위에선 연극 제목을 줄여 태명을 ‘뜨.바’라고 지으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부인과 산부인과에서 첫 검사를 한 뒤 하늘을 보니 비가 그치고 날이 푸르러 ‘날 푸름이’로 태명을 지었어요.”
이명행은 중앙대에 입학해 71년 오랜 전통의 ‘영죽무대’라는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 후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2007년에 마방진 극단에 들어가 고선웅 연출가와 쭉 작업을 해오고 있다.
관객을 긴장시키는 연극은 경계하지만 모든 연극은 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이명행. 이런 그에게 제일 무서운 관객은 부인과 가족같은 ‘마방진’ 단원들었다. 오는 8월 4일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 자리한 무서운 관객들 앞에 그가 선다.
“27년전 연극의 기폭제 역할을 한 작품이잖아요. 한편으론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사명감이 생겨요. ‘뜨거운 바다’에서 기능적 판의 우두머리 역할인데 ‘정말 잘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ekgns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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