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을 미뤄서는 안 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곧장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는 대로 동방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신이 바라시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2세기 무렵 로마 광장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 예수’를 외치며 무릎을 꿇는다. 군중 사이에서 자연스레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 커다란 함성 속에서 한 사람이 막 연설을 끝낸 교황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슬람 타도 원정에 참가하겠다고 서약한다. 그리고 수많은 전사들이 연이어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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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지음/송태욱 옮김/문학동네/1만9800원 |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00여년 동안 치러진 전쟁 이야기다. 왕권을 짓누르고 유럽 정치의 전면에 나선 교황의 치세가 천년만년 이어질 것 같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 십자군은 조직됐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해진 시오노 나나미는 태생이 같은 기독교와 이슬람, 즉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전쟁을 아주 생생하게 그렸다. 역사를 주제로 한 재미없는 딱딱한 전쟁 이야기를 다이내믹한 문체로 탈바꿈시키고, 독자들을 900여년 전 시대로 끌고가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전쟁 과정을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면서 장대한 흐름의 의미를 짚어내는 기술, 세심한 통찰은 시오노 나나미만의 특기인 것 같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부터 200년간 양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 문제는 오늘날도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인 개신 기독교를 대표하는 미국과 이란·이라크의 충돌이 우선 떠오르는 사례. 작자는 이런 시각으로 십자군 이야기를 펴냈다. 이번에 나온 시리즈 3권은 완결편. 600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2년여 걸친 작업이다.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1차 십자군 결성을 다룬 1권, 이슬람의 대반격 과정을 담은 2권에 이어, 3권은 예루살렘 왕국이 무너진 뒤 100여년간 이어지는 3∼8차의 십자군 원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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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
작가는 다음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뒤에도 옳은 전쟁만은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고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내는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든다.”
훗날 평자들은 지적한다. 무모한 살상과 피비린내나는 비극으로 끝나 교황의 몰락을 스스로 자초한 행위였다고…. 전쟁을 이끌어내 무엇을 바랐는가. 결국 신을 앞세웠거나 명분을 가졌더라도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참혹함뿐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준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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