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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세계제국 일궈낸 개혁가

입력 : 2012-02-10 16:48:36 수정 : 2012-02-10 16: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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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두번째로 통일, 현대 中 영토 구축 토대 마련
후비 소생으로 인재 등용 파격… 유학을 통치 이념 삼아
고대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한나라의 여섯 번째 임금 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 156∼BC 87년)은 우리 민족에 그리 유쾌한 인물은 아니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무자비한 정복 군주로 기억되는 까닭이다. 무제는 흉노 정벌 전략으로 흉노와 연계하던 고조선을 멸망시켜 한사군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했다. 그러나 무제는 중국 역사에서 첫째로 꼽는 걸물이다. 지금의 중국 판도를 확장하고 유학을 국시로 삼은 등 문무를 겸비한 군주다. 처음 통일 중국을 이룩한 진시황제 영정보다도 인기가 높다. 중국의 역사학자 양성민(76)이 쓴 800여쪽의 이 책은 무제 유철의 제위 54년간의 기록이다. 저자는 동중서의 동중서전, 반고의 한서, 사마천의 사기 등 역사서를 저본으로 현대에 맞게 풀이했다.

양성민(楊生民) 지음/심규호 옮김/민음사/3만5000원
한무제 평전―진취적 개척정신으로 세계제국을 일궈낸 개혁가/양성민(楊生民) 지음/심규호 옮김/민음사/3만5000원


16세 때 왕위에 오른 한무제는 200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오늘날 개혁 군주의 모습 그대로다. 거느리는 여자만 수천명이었을 정도로 방탕하고 색광이었다는 점만 빼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견할 수도 있겠다. 무제는 이민족을 정복한 후 다민족국가 중국의 특성을 살린 영리한 군주였다. 광활한 영토에 풍속이나 사회제도가 제각각인 여러 소수 민족이 공존했는데, 이들에게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칭기즈칸처럼 몽골식 제도나 습속을 강요했다면 얼마 못가 무너졌을 것이다.

저자는 “다행스럽게도 무제는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는 인기고속(因其故俗) 정책을 취해 관리하고 통치했다”면서 “무제가 소수 민족에게 일국양제를 실시한 것은 오늘날 홍콩과 비슷하다”고 풀이한다. 이는 중국이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치 방식이다.

특히 하나의 중국으로 묶어진 이유는 군주들이 하나같이 통일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럽과 크게 다르다. 유럽은 중세 이후 여러 나라로 분열된 채 이제껏 분리돼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분열 시기에도 각 정권은 항상 전국을 단일 정치제제로 묶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한족 정권이든 소수 민족 정권이든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의 부견은 소수 민족의 우두머리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중국의 통일은 역사적으로 두 단계를 거쳤다.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통일된 국가를 이룬 것이 첫째이고, 무제는 현재의 중국 판도에 속한 지역을 거의 복속해 지금의 중국 강역을 만든 것이다. 중국 학자 판원란(范文瀾)은 “2000여 년 인물인 무제가 현대 중국의 광대한 강역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놓았다”고 평했다.

무제의 인재 등용 방식은 당시 사회 질서를 깨는 파격 그 자체였다. 자신이 후비의 소생이었기에 기존 틀을 깨고 싶은 욕망도 있었겠지만, 열린 사고와 진취적 기상은 결코 현대 인물들에 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황후 위자부는 물론이고 서역을 정벌한 대장군 위청과 곽거병 등이 모두 노비 출신이다. 고대 중국의 발전에는 이런 열린 사고들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해 후비의 소생임에도 황제가 된 무제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공자의 유설이 2000여 년간 이어오면서 동아시아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순전히 무제 때문이다. 무제가 유학을 국시로 정한 데는 궁중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과 인간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7세기 경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장건출사서역도(張蹇出使西域圖). 그림 아래쪽에 무제가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장건에게 명령을 내리고 장건이 무릎을 꿇은 장면이다.
한무제와 진시황이 다른 점은 진시황은 분서를 감행했으나, 무제는 서적을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당시 수집한 서적은 유가 경전 외에도 제자백가의 사상서, 기술서 등을 망라했다. 지방정부도 서적 수집은 최우선 사업이었다. 동중서, 아관, 동방삭, 사마천이 무제 때 꽃피운 대표적 학자들이다.

고조선 정벌에 관해서는 수긍할 수 없는 기술도 엿보인다. 중국 학자가 쓴 평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고조선 부분은 너무 허술하다. 예컨대 고조선에 기자를 보내 다스리게 했다거나, 우거나 위만을 보내 조선을 다스리게 했다는 부분은 사실관계가 불명확하다. 저자는 “이들이 조선을 다스리면서 한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문물을 발전시켜 융성했다. 기원전 1000여 년 전부터 나라가 세워져 안정돼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그 이전에 안정된 왕조나 정권이 자리 잡았을 것이지만 이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저자가 저본으로 사용한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동중서의 사서 등은 한나라 사서라는 점에서 오류나 의도적 작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한정시키고 있는 것도 정복자의 입장에선 쓴 의도적인 축소로 보인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 @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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