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가 따로 없다. 법을 만드는 소임을 부여받고도 앞장 서서 법을 무시하는 국회 얘기다. 여야 대립으로 법정개원일보다 89일이나 늦게 문을 연 18대 국회의 모습은 지난해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 ‘해머’ ‘식물’ ‘최루탄’ ‘최다 직권상정’ 등의 불명예 기록을 1년 더 연장한 게 고작이다. “선거를 통해 반(反)법치주의자는 공직 진입을 봉쇄해야 한다”(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영호 교수)는 쓴소리가 나올 법하다.
의원들에게 헌법과 국회법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예산안 처리가 대표적이다. 올해 예산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로 여야가 충돌하면서 법정시한(12월2일)보다 한 달가량 늦게 통과됐다. 9년째 위헌이다. 예산안 의결 후 예산·자금배정 계획 수립 등 집행을 준비하는 데만 보통 2∼3주가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연초 사업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회계연도 개시 전 배정’을 통해 예산을 미리 집행하지만, 예산파행으로 연초부터 시행하려던 일부 사업은 1월 말이나 돼야 실제 집행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치 논리에 발목이 잡힌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1명의 자리는 지난해 7월 초 이후 6개월 가까이 비어 있다. 헌법재판관 결원시 국회 회기가 시작된 후 30일 안에 후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헌법재판소법은 헌신짝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조용환 후보자(민주당 추천)에 대한 여야 시각차에서 비롯된 공석 사태가 정치싸움으로 장기화되고 있다.
헌법재판관 한 명은 단순히 숫자 1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6명 이상 찬성하면 위헌 결정도 할 수 있는 만큼 5대 3으로 의견이 갈릴 경우 한 명의 힘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헌재가 민감한 사안의 결정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다. 헌재 관계자는 “국회의 직무유기로 국민이 권리 침해로부터 구제받을 기회비용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덕, 박보영 두 대법관에 대한 임명동의안도 지난해 11월9일 국회 인사청문특위의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이후 54일 만인 올해 1월1일 새벽에야 통과됐다. 그동안 사법부의 최고의결기관인 전원합의체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3개의 소부가 담당하는 사건 처리도 차질을 빚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민감하고 다툼의 소지가 큰 사건의 경우 다수결로 결정하는 전원합의체의 두 자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결론을 내는 데 고민이 컸다”며 “결국 국민이 50여일간 피해를 본 셈”이라고 말했다.
헌재에서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법령 조항을 제때 손질하지 않은 것도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후속조치가 늦어지면서 입법공백을 초래하거나 부당한 권리침해 상태는 계속된다.
지난해 12월16일을 기준으로 봤을 때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으나 시한까지 개정되지 않아 효력을 상실한 조항은 야간 옥외집회를 규제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과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가 방송광고판매를 독점하게 한 방송법 등 무려 7건에 달한다. 법인의 약국 개업을 금지한 약사법 등 7개 조항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도 국회에서 개선입법을 하지 않아 수년째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위헌 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하고도 후속 입법조치가 없어 정비되지 않은 법령조항도 13건이다.
헌재 관계자는 “바로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법적 공백 때문인데, 국회가 이를 방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노동일 교수는 “제대로 된 법치국가라면 국회부터 절차를 준수하고 다수결 원칙과 타협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며 “내부적으로 어떻게 협의하는지는 정치적 영역이지만, 최종 결과는 소수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기회를 부여한 뒤 표결로 나타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이우승·김태훈·우상규·유태영·김유나·서지희·이유진·박영준·서필웅·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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