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한 자녀 셋이 하나는 결혼하고 둘은 대학가고 모두들 집에서 나가니 집이 너무 넓고 쓸쓸하다.
해서 이층에 세를 주니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나 이층에 사는 아주머니를 통해 조선족 교포와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정말 소설 쓸 일이 한두개가 아니다. 그들의 인생 역정이 어찌 그리도 험난하고 처량하고 서글픈지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독립 투사로 만주를 떠돌다가 거기서 안착을 하고 후세를 이루고 살게 되니 후세들은 국적은 중국이나 중국 사람이 아니고 조선말을 하나 남한에 가면 또한 남한 사람에 속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저기서도 천덕 꾸러기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서울에 가니 식당마다 조선족 여인들이 일을 하고, 연안 부두에 중국 연변 심양으로 추석 쇠러 가려면 표를 미리 사야 한다던 젊은 여인들하며 참 여기 저기 조선족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가운데 수많은 조선족들이 중국 여권을 가지고 중국인으로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그들과 자주 거실에 앉아서 그들에게 말을 시킨다.
어느 분은 연변 그리고 심양 그리고 길림성 연길 여기 저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중국의 도시에서 미국 으로 돈을 벌러 온 것이다. 미국으로 들어올 때 비자를 받는 것도 아주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들어와서는 일단 돈을 벌고 나간다고 주저 앉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래도 가난한 중국보다 돈 벌기가 낫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 모두 조선족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말을 익히고 중국어는 한 시간 따로 배우고 그렇게 해서 두 나라말 모두 정확히 구사한다.
집에 와서 중국어로 말을 하다가 아버지 한테 매를 맞았다는 심양 아저씨. 미국이나 일본의 교포 2 세들이 집에 와서 한국말 안한다고 매 맞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나는 지난 여름 방학에 백두산 여행에서 말했듯이 중국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조선족 근로자들을 보며 우리 독립 투사들을 받아주고 거기서 후손들을 살게 해준
중국이 지금은 고맙기까지 하다. 중국 교포중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 아주 가난해서 만주로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 그리고 독립 투사들 그둘 중 하나가 자기들 조상인 이들이다.
어느 쪽이 조상이든 모두들 북한에 가깝고 그들도 북한 사투리를 하니 같은 민족이지만 이질감은 느껴진다. 그중 어느 분은 누님이 63세정도 됐는데 지금도 신의주에 살고 있다고 한다 .
모택동이 죽고 나서 중국 동생 집에 안오니 아마 까마득한 옛날에 누님을 뵈었다고 눈물울 글썽인다. "아마 돌아 가셨을 거야" 한다. 예전엔 북한에 사는 형제들이 가끔 중국에 사는 친척들 집에 오곤 했다고 한다.
김일성 뱃지를 가슴에 달고 말할 때마다 위대한 수령님 어쩌고 하면 중국사는 사람들이 반감이 컸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얼굴이 참 재미있다.
북한 누님왈: 우리 위대한 수령님 덕에 중국 동생 집에 오게 되었지.
중국 동생대답: 그 개대가리 놈 이름은 앞에 붙이지 마시라요.
북한 누님 왈: 동생 큰일 날 소리 하지마라. 잡혀 가다이...
중국동생 : 잡혀 가긴 요긴 중국땅이야요.
중국 올 때 누님 얼굴은 못먹고 말라 비틀어져 앙상한 송장 모습인데 중국 와서 잘 먹고 살이 쪄서 돌아 간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4년 후에 다시 방문 했는데 또 얼굴이 송장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위대한 수령 아바지 하니 화가 나서 김일성한테 막 욕을 했다고 한다. 유머 같아서 한참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 이어지는 슬프고 어두운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중국 에서 태어나서 중국에서 자라고 중국 군대에 갔다 왔다. 중국 군대도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고 뽑혀야 간다고 한다. 일단 중국은 군에 갔다 오면 직업을 준다고 한다. 육군은 3 년이고 해군은 4년이고 한다.
심양 아저씨는 어느날 중국에서 부산 가는 유조선에 타고 부산 어느 항구에서 내려 수영을 하고 부산으로 숨어 들었다. 부산 해경에게 발각되어 간첩으로 오인받고 잡혀 갔다. 자기는 조선족이고 간첩이 아니 라고 하고 4 일간 구류를 살고 다시 배로 돌려 보내졌다. 그 배는 하와이로 가는 배였고 하와이에 와서 배를 탈출하여 미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찌 어찌 하여 알라스카까지 가서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는데 한국인인 주인이 인권비를 안주고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마 식당이 망해서 그랬으리란 생각이 든다. 고생 고생을 하며 불법 체류라는 약점을 가지고 사간 수당을 떼 멕히고 물심 양면으로 너무도 고통스런 세월을 산 것 같다.
그 세월이 15년이라고 한다. 나보다 더 긴 세월을 미국 에서 산 셈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꼭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너무도 굴곡 많고 슬픈 사연들이 많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고 많은 생각을 한다. 지난번 서울에서 독립 투사 훈장을 후손들이 국가에 반환하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는가? 하기야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어 아둥 바둥 하는가? 아직까지도 그런가?
내가 볼 땐 지금은 잘 사는 것 같은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든 해외에서 태어났든 단군의 후손이면 모두
대한민국 사람으로 인정해 면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면 좀 돌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가난에 찌들어 중국을 탈출하다시피 하는 조선족들의 처참한 미국 생활이 내 양심을 건드린다.
물론 아주 아주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잘살고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고생하는 그런 사회의 미래가 과연 얼마나 밝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누구도 독립 투사 같은 애국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보면 그렇다.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제시대 독립 운동하러 만주에 안간 것을 자랑해야 하는지 어느 것이 옳은 건지 사리판단이 안선다. 나도 조선족으로 태어 났으면 저들과 거의 비슷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내 앞에 있는 조선족 재미동포들이 돈 많이 벌어 중국에 돌아 가기를 빈다.
/ 유노숙 워싱턴 통신원 yns50@segye.com 블로그 http://yns1.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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