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독일 뮌헨대학에서 내가 받은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 학문의 터 혹은 캠퍼스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누가 학생이고 어느 것이 대학 건물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졸업하는 게 그리 쉽지도 않고, 그렇다고 졸업 후 좋은 직장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학생 수는 한때 6만명을 넘었다. 최근엔 구조조정을 통해 그나마 4만8000여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많은 학생이 몰려드는 데는 뭔가 분명한 이유가 있을 법했고, 나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낭만을 즐기며 무조건 열심히 공부했다.
독일에는 보통 한 도시에 하나의 대학이 있다. 그래서 대학과 도시의 관계는 긴밀하다. 독일에서 손꼽히는 문화·교육 도시인 뮌헨은 옛것과 새것, 그리고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이 잘 어우러진 도시다. 동시에 독일을 대표하며 신기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대기업 지멘스, 알리안츠, BMW, 린데 등의 본사가 몰려 있기도 하다. 뮌헨대학은 바로 이런 도시의 장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도시가 주는 이미지에 걸맞게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학이다.
현재 독일 대학들이 당면한 과제는 세계화의 대세에 편승하는 일이다. 그래서 각 대학은 첨단산업이나 각국의 언어·문화 습득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뮌헨대학은 이런 면에서 선두에 서 있다. 뮌헨공과대학과 막스프랑크연구소, 프라운호퍼연구소 등과의 공동연구 작업이 활발하다. 최근에는 바이오기술과 관련 의학 분야에서 미국 하버드대학과 밀접한 협력작업을 하고 첨단 바이오기술 단지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전 세계 우수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문의 보편성과 우수성을 상호 교환하고 있다. 한국과는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동아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전체 학생의 16%인 7800명 정도가 전 세계 125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다. |
뮌헨은 1919년 독일노동자당(DAP)이란 극우단체가 생기면서 나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엔 대학 본관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정신적 기초를 형성해주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곳이 대학이기에, 1943년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대 학생들이 나치의 폭거에 항거하며 목숨을 건 학생운동(백장미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학은 이를 기리기 위해 1997년 본관에 ‘백장미사건’ 기념관을 설립했으며, 교정 한켠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숄 광장과 당시 학생들을 지도한 교수의 이름을 딴 ‘후버 교수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1472년에 개교한 뮌헨대학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지금도 독일에서 연구성과가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프라운호퍼나 뢴트겐, 페텐코퍼, 리비히, 포이에르바흐, 셸링, 바더, M 베버, 킨더만 같은 교수는 대학의 위상을 드높였다. 뿐만 아니라 뢴트겐과 빌란트, 하이젠베르크, 로렌츠 등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국인 중에는 ‘압록강은 흐른다’로 잘 알려진 소설가 이미륵(본명 이의경)을 비롯해 전혜린, 김철수, 허영씨가 이곳에서 공부했다. 학문은 출세나 똑똑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보람 있게 살아가는 방편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걸 뮌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느꼈다. 더불어 뮌헨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투자요, 직업적 성과를 얻는 디딤돌이 되리라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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