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꿈을 잃어가는 10대
대한민국 청소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차안대(遮眼帶)를 낀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경주마가 연상된다. ‘3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 ‘5포세대(‘3포’에 내집마련·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세대)’로 불리는 청춘의 자화상에서 행복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일보가 올 초 창간 26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의 행복감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응답은 12.6%에 불과했다.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시키며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했지만 한국민은 그에 걸맞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지는 우리를 옥죄는 불행의 실상을 세대별로 들여다보고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학원에 가라니까 가고, 공부를 하라니까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올해 중학교 3학년인 A(15)양은 매일 방과 후 곧장 학원으로 향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져온 생활이다. 주말도 다르지 않다. 학원 보충수업을 듣다 보면 주말이 훌쩍 지나간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지만, A양은 오늘도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B(17)군의 꿈은 운동선수였다. 불의의 부상으로 운동선수의 꿈이 사라진 뒤 B군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제 공부밖에 도리가 없다”는 부모님의 말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청소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만 해도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를 꿈꾸지만 학년이 높아질수록 원래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일보가 최근 서울시교원단체총연합회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저학년(2학년), 고학년(6학년), 고등학생(2학년) 300명을 대상으로 장래희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이런 세태가 20대의 공무원시험 열기, 인문학·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0대 청소년은 왜 어린 시절의 꿈을 버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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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년이 되면서 하나둘 사라져가는 ‘과학 꿈나무’
본지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저학년은 과학자(18%)를 최고의 장래 희망으로 꼽았다. ‘로봇을 만들고 싶다’거나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교사(15%)와 운동선수, 예술가(이상 12%), 의사, 경찰(이상 9%) 등이 뒤를 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직업의 이미지와 주변의 영향 등을 이유로 장래 희망을 결정했다.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교사가 된다거나 아픈 가족을 치료해 주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응답이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은 경찰(12%), 교사(10%) 등을 선호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의로운 직업이라서’라는 응답에서 보여지듯, 이때까지만 해도 직업 선택의 동기가 대체로 순수하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공무원’(4%)이 되겠다는 응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의 경우엔 공무원(15%)이 되고 싶다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정년이 보장된다’, ‘부모님이 추천했다’는 이유가 많았고, ‘내 성향도 공무원에 맞는 것 같다’는 답변도 있었다. 교사도 고등학생 사이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 직업이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고등학생이 희망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초등학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꿈꿨지만 고등학생은 ‘안정적인’ 교사를 원했다. 군인을 선택한 이유도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직업의 안정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설문에 응한 고등학생 100명 가운데 과학자를 지망한 학생은 천문학자를 꿈꾼다는 1명에 불과했다. 어떤 학생은 ‘대기업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적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해 밥벌이를 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자녀를 안정적 직업으로 몰아가는 한국 학부모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들은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직업으로 의사, 법조인, 교사 등을 꼽았다. ‘사회적 명성’(37%)을 고려한 선택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부모는 교사(16%), 공무원(10%)을 첫손에 꼽았다.
초등학생 학부모는 대체로 자녀의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명성’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들었지만 고등학생 학부모들은 ‘안정’을 최우선시했다. 대다수 고등학생 학부모(23%)는 자녀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안정적인 직업을 바란다’(49%)는 의견은 절반에 육박했다.
공무원·교사가 되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이 고등학생 대상 설문에서 급증한 것은 이런 부모의 바람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어릴 때 꿈이 과학자였다가 현재는 자신과 부모 모두 교사를 원한다고 응답한 한 학생은 “어릴 땐 철이 없어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선교사를 꿈꿨던 한 학생은 “부모님은 ‘공무원만 한 직업이 없다’고 늘 말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획일화가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될 수 없도록 함으로써 학생 본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손해라고 지적하면서 학생들이 ‘꿈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윤진 중앙대 청소년학과 교수는 “진로 교육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포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의 김나현 상담사는 “아이들이 꿈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뿐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한다”며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청소년 지원 방법과 지지 체계가 더욱 다양해지고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우중·이지수 기자 lo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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