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역사는 한국경제 발전의 역사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25주년을 맞은 삼성의 매출은 사반세기 동안 9조원에서 384조원으로 39배나 증가했다. 반도체·TV·휴대전화 사업은 세계 1위에 올랐다. 이 같은 삼성의 성장은 한국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이다. 국내 전자산업을 일으키고 소니로 대표되는 전자왕국 일본까지 제친 삼성. 이제 휴대전화 사업은 ‘노키아 왕국’를 몰락시키고 애플의 아성을 넘어 최종 승자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삼성 25년의 ‘혁신 DNA’를 집중 조명해본다.


반도체산업은 1990년대 한국 수출과 경제성장의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한 이후 반도체 수출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1995년 전체 수출의 14%(177억달러)를 차지했다. 2000년에는 260억달러를 수출하며 비중이 15%까지 올라갔고 지난해도 502억달러(9%)를 기록하는 등 20년 동안 반도체는 한국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난해 무역수지는 321억달러 흑자인데 반도체가 올린 흑자만 177억달러에 달한다.
이 같은 반도체 산업 성장의 주역은 삼성전자다. 64메가 D램 개발 이후 19년 연속 메모리 세계 시장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낸드 플래시 역시 2002년 이후 10년 동안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에는 늘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83년 64K D램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고 1992년 64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세계 시장을 선도했다. 또 세계 최초 64기가 낸드플래시 개발(2007), 세계 최초 30나노급 4기가 모바일 D램 양산(2011년 3월), 세계 최초 20나노급 2기가 D램 양산(2011년 9월), 세계 최초 20나노급 4기가 D램 양산(2012년 4월)으로 기술격차를 벌려나가고 있다.


“언제까지 그들(미국, 일본)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1974년 12월. 반도체야말로 미래산업을 지탱할 ‘산업의 쌀’이라고 생각하던 이건희 회장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한미합작사 회사였던 한국반도체가 파산위기에 몰린 것.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성장을 위해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으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굳게 믿던 이 회장은 한국반도체 인수를 적극 건의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반대했다.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첨단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다며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이 회장은 결국 사재를 털어 지분을 인수했다. 선진국과의 극심한 기술격차, 막대한 투자재원 조달, 고급 기술인력 확보, 특수설비의 공장건설 등 모든 것이 난제였다. 그러나 이 회장은 집요한 설득 끝에 1983년 호암 이병철 회장의 ‘2·8 도쿄 구상’을 이끌어 냈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그렇게 시작됐다.
인력과 기술의 불모지에서 반도체 사업이 세계 1위에 오른 데는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투자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은 1983년부터 2∼3년 동안 반도체 1, 2라인에 그룹 역량을 쏟아부었지만 적자는 계속됐다. 1983년 64K D램 한 라인 건설에만 1500억원을 투자했는데 당시 삼성전자의 매출총이익은 1700억원에 불과했다.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무너진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삼성은 1987년 8월 ‘3라인 건설’이라는 승부수를 던진다. 결국 1988년 반도체는 없어서 못 팔 정도의 대호황을 맞았고 1989년 손익분기점을 돌파해 1조원 이상의 투자비를 회수했다. ‘반도체 투쟁’ 성공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는 현재 반도체 1위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월반형 R&D’라는 이 회장의 독특한 기술개발 전략도 주효했다. 처음부터 개발 인력을 나눠 차세대 제품과 차차세대 제품을 동시에 개발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적중했다. 이는 현재 경쟁업체가 따라오지 못할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삼성만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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