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구촌의 애플 매장은 기술 혁명의 성지(聖地)로 우뚝 섰다. 전 세계의 애플 마니아들은 마치 성지 순례를 하듯 애플 매장을 찾고 있다. 전 세계의 광팬들은 한 잎 베어먹은 애플의 로고를 신앙의 상징물처럼 숭배하고 있다. 잡스가 선지자처럼 나타나 애플의 신제품을 선보일 때마다 지구촌은 미지의 신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잡스는 그러나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도 아니다. 그는 금세기 최고의 CEO (최고 경영자)일 뿐이다. 그는 최고의 인재를 끌어 모아, 이들이 최고의 첨단 제품을 만들도록 독려하는 디지털 기술 분야의 지도자였다. 그는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천재였다.
잡스의 성공 뒤에는 광신도처럼 그를 따르는 일군의 소비자가 있었다. 잡스는 이를 자산으로 크로스오버 (교차) 기술의 신기원을 열었다. 21살의 명문 리드대학 1학년 1학기 중퇴생이 천재 공학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1976년에 가정 집 창고에서 애플사를 창업해 5년만에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털리와 이사회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잡스는 새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만들어 재기에 나섰다. 넥스트가 만든 기술은 훗날 월드 와이드 웹의 탄생에 일조했다.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최초의 CG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등을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잡스는 40대에 접어들어 넥스트를 애플사에 팔고, 경영난에 빠진 애플사 CEO로 복귀했다. 잡스는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연속 대박을 냈다. 애플사는 이제 세계 최고 IT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잡스는 그러나 56년 동안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시리아에서 유학온 생부 압둘파타 잔달리와 위스콘신대 대학원생 캠퍼스 커플이었던 생모 조앤 심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심슨 가족은 잔달리가 시리아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해 잡스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됐다. 잡스는 악동으로 자랐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는 다혈질의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자신과 첫번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수년 간 돌보지 않은 나쁜 아빠였고, 평생 한 번만 만나달라는 생부의 요구를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1991년에 현재의 부인과 결혼해 세 자녀를 더 두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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