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창업주들의 치열한 분투 보는 듯
기업 강의를 앞두고 다시금 ‘삼국사기’를 펼쳐 읽었다.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18년까지 불과 40여년 동안, 박혁거세·고주몽·온조가 차례로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간 과정은 마치 스타트업 창업주들의 치열한 분투를 지켜보는 듯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6부’라 불리는 여러 유력 집단의 합의로 추대된 대표였다. 여러 명의 공동 창업자로부터 선택받은 셈이니, 그의 기업은 애초부터 개방적 구조를 지녔다. 인재 영입도, 경영 운영도 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낙랑 군대가 신라를 침략하려다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곡식이 들판에 그대로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이 나라는 도덕이 있는 나라”라며 철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 출신 호공을 사신으로 임명해 마한에 보냈다는 기록, 외국 출신 석탈해를 4대 왕으로 세운 사실 역시 개방적 기풍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로 치면 거버넌스가 갖추어진 오픈형 스타트업에 가깝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동부여라는 거대 기업에 들어가 활쏘기라는 당대 최고의 핵심 기술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기존 최고경영자(CEO)의 아들들이 시기와 견제를 일삼자, 그는 원천 기술에 해당하는 준마(駿馬)를 몰래 확보한 뒤 회사를 떠나 독립했다. 졸본성에 고구려라는 새로운 회사를 세운 그의 행보는 오늘날, 대기업에서 경험과 기술을 흡수한 뒤 독립 창업에 나선 테크 스타트업 대표를 연상케 한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또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고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주몽이 적자인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자, 후계 경쟁에서 밀린 온조는 ‘분사 창업(spin-off)’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형 비류가 인천 일대를 선택한 것과 달리,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다. 수요와 성장 잠재력을 간파한 그의 판단은 탁월했다. 나라의 이름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뀔 만큼 사업은 번창했다. 스타트업의 성패가 업종과 시장 선택에서 갈린다는 사실을 일찍이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실패한 창업주도 적지 않았다. 온조의 형 비류가 수요가 없는 입지를 선택해 몰락한 것이 대표적이다.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 역시 옹졸한 리더십으로 실패한 사례다. 그는 고구려 태자 무휼과의 지식 경쟁에서 패하고, 병합 전쟁에서도 패전하여 결국 목숨을 잃었다.
흥미롭게도 혁거세·주몽·온조에게는 공통된 성공 요인이 있었다. 첫째, 그들을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혁거세는 태어날 때부터 고허촌장 소벌공의 도움을 받았고 자라서는 알영과 혼인해 든든한 내조를 얻었다.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는 오이·마리·협보라는 세 벗이 함께했다. 온조가 졸본성을 떠날 때도 오간과 마려가 남쪽으로 동행했다. 이들은 모두 리더의 꿈과 비전에 공감하여 모험을 감행한 파트너들이었다.
둘째, 리더십 승계에 성공했다. 혁거세는 61년간의 재위 후 적자인 차차웅에게 왕위를 넘겼고, 차차웅은 낙랑군과 왜적을 물리치고 가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했다. 주몽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동부여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는 어린 시절 ‘아비 없는 아이’라는 조롱을 듣다가, 아버지가 숨겨놓은 징표인 부러진 검을 찾아내 졸본성으로 가서 마침내 고구려의 제2대 왕이 되었다. 지혜와 용기를 갖춘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온조 역시 장남 다루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50년간 왕조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게 했다.
2000년 전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면, 기업 경영의 핵심 조건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주몽·온조는 선제적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온몸을 던져 실행했으며,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뿌리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