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찰의 주지의 사망 이후,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입금해 둔 계좌에서 상속인의 동의 없이 2억5000만원을 인출한 사찰 사무 담당자(원주)와 후임 주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명시적인 계약이 없어도 사회 통념과 신의성실의 원칙(조리·신의칙)에 따라 위탁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며, 횡령죄 성립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18일 대법원 3부(주심 노경필 대법관)는 횡령, 사전자기록등위작교사(전자문서 위조 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와 B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횡령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방법원에 환송한다고 밝혔다.

사건은 서울 중랑구 D사찰의 주지였던 C씨가 2022년 3월 22일 코로나19로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이튿날인 3월 23일 후임 주지 A씨와 원주 B씨는 C씨 명의 계좌에서 상속인 E씨의 동의 없이 2억5000만원을 출금하거나 A씨 명의로 이체했다. 이후 두 사람은 횡령 등 혐의로 기소됐다.
B씨는 2000년경부터 C씨의 지시에 따라 해당 계좌를 관리해왔으며, C씨는 B씨에게 계좌 통장과 도장 등을 맡긴 상태였다.
1심 재판부는 D사찰을 C씨의 개인사찰로 판단하고, 통장에 입금된 돈 역시 C씨 개인 소유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해당 금전은 상속인 E씨에게 상속돼야 하며, B씨는 금전 관리자로서 C씨 사망으로 위임관계가 종료되었더라도 상속인에게 반환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A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B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은 횡령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C씨 사망과 함께 B씨와의 위임관계가 종료됐고, 상속인 E씨가 B씨에게 계좌 관리를 부탁한 사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계좌에 보관된 돈은 은행이 상속인을 위해 관리할 의무를 부담하고, 상속인도 직접 은행에 예금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B씨가 해당 자금을 관리해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찾기 어렵다고 봤다.
다만 A씨와 B씨가 사망한 C씨 명의로 예금청구서를 위작한 사전자기록등위작(전자문서 위조)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A씨 징역 1년, B씨 징역 6개월에 각각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2심 판단이 횡령죄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횡령죄에서 위탁관계는 반드시 계약에 의해서만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무관리·관습·조리·신의칙 등에 의해서도 성립될 수 있다”며 “B씨는 조리 또는 신의성실 원칙에 따른 위탁관계에 의해 망인 계좌에 입금된 돈을 피해자 E씨를 위해 보관하는 지위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또한 대법원은 “B씨가 C씨의 위임으로 계좌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왔고, C씨 사망 후에도 조리·신의칙상 E씨의 재산을 보호·관리하는 지위에 있었다”며 “또한 민법상 위임사무 처리로 받은 금전을 반환할 의무를 부담해 형법상 위탁관계까지 종료됐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에는 횡령죄의 위탁관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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