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조명과 무도회장을 꽉 채운 현란하고 눈부신 의상의 왕족과 귀족들. 이보다 화려할 수 있을까 싶은 왕실 연회장에서 왕자 지그프리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여인 오딜이었다. 춤으로 인사를 나눈 둘은 각자, 또다시 함께 춤을 춘다. 오딜이 자신이 찾던 운명이라고 믿은 왕자는 한 손은 가슴에 얹고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그 순간 비탄에 빠진 오데트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진실을 알게 된 왕자는 절규하며 무도장을 뛰쳐나간다.
유니버설발레단(UBC)이 고전 발레의 정점(頂點) ‘백조의 호수’에서 명문 발레단으로서 지닌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주역부터 단역과 군무까지 모든 무용수가 탄성 나오는 춤과 연기를 보여줬다. 여기에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디자이너 출신인 갈리나 솔로비요바의 새로운 의상과 무대가 더해지면서 이번 ‘백조의 호수’를 역대급 공연으로 끌어올렸다.


19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받은 무대는 세계적 발레리노 다닐 심킨 몫이었다. 부모 모두 저명한 러시아 무용수였던 집안에서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해서 여러 콩쿠르를 석권한 후 미국과 독일에서 활약한 이 발레 스타는 지그프리트로 우리나라에서 첫 전막 공연을 펼쳤다. 그가 지그프리트로 걸어나오는 순간부터 명장면의 연속이었던 23일 공연에서 발레팬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장면은 2막 지그프리트와 오딜의 2인무.
금실, 자수, 튤 레이스를 활용한 화려함과 극적 색채감이 돋보이는 의상을 차려 입은 귀족과 궁정 인물 사이에서도 심킨은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왕자만이 가질 법한 품격이 배어 나왔다. 자연스러운 연기 끝에 춤 추는 순간이 돌아오자 숨을 멎게 하는 고난도 연속 회전을 너무도 깨끗하게 완성했다. 부드러운 도약으로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고 연속적으로 도약하며 무대를 도는 모습으로 순수한 열정과 기쁨을 표현했다. 공연 전 기자회견에서 “몇 바퀴를 도느냐보다, 그 회전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품격 있게 인물을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실제 그의 춤에서는 기교를 넘어선 품위와 감정적 깊이가 느껴졌다. 최고 기량의 무용수라도 연속 회전 중엔 조금씩 축이 되는 발 위치가 움직이기 마련인데 심킨의 발은 처음 점찍은 그 위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어려운 걸 쉽게 한다’는 명인의 경지를 보여준 건 상대역 홍향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이 스물 두 번째 오데트·오딜 출연이라는 UBC 간판 무용수 홍향기 춤은 반주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늘 그렇듯 홍향기의 춤은 힘이 넘쳤고 무대를 압도하는 듯한 강렬한 존재감과 독보적인 테크닉이 발휘됐다. 흑조 파드되의 하이라이트인 32회 연속 푸에테 회전을 완벽히 소화해낸 홍향기는 다시 심킨과 아름다운 춤으로 조화를 만들어낸 끝에 오딜로서 지그프리트의 사랑을 쟁취해냈다. 서로의 기량을 과시하듯 춤으로 대결하다 감복한 지그프리트가 오딜을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관객은 고전 발레의 정수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이날 공연이 다닐 심킨·홍향기만의 무대는 아니었다. 특히 1막 초반 밝고 경쾌한 3인무에서 임선우가 대단한 춤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로트바르트 역을 맡은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솔리스트로서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 마린스키 버전 백조의 호수에서 비중이 큰 어릿광대로는 김동우가 무대에 올라 뛰어난 기량과 감초 연기로 갈채를 받았다.

UBC가 자랑하는 군무 역시 이날 진면목을 보여주며 객석의 감탄을 자아냈다. 수십 명의 무용수가 한 치의 오차 없는 타이밍으로 물 흐르듯 움직이며 무대 위에 진짜 호숫가 백조를 그려냈다. 모두가 좋아하는 볼거리인 네 마리 백조춤은 손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일치된 움직임으로 큰 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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