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국 “역사상 중대·비극적 사건”
유족, 성적 일탈 의혹에 관심 집중 우려
대선후보 시절 공약 따라 공개됐지만
‘엡스타인 스캔들’ 커진 시점과 맞물려
관련자료 전면공개도 안 해 내부 분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1일(현지시간) 미국 민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암살 사건과 관련한 연방수사국(FBI) 기록 23만여 쪽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번 기록 공개가 공교롭게도 성범죄를 저지른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관련한 파문이 한창인 가운데 이루어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분노한 지지층을 달래기 위한 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이날 23만 쪽 이상이 되는 킹 목사 관련 기록 공개에 대해 “역사상 중대하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완전한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한 우리의 임무에서 어떤 돌도 뒤집어보지 않은 상태로 두지 않을 것”이라며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한 최소한의 편집만을 했다”고 밝혔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세계일보 자료사진
킹 목사는 1968년 4월4일 분리주의자(인종차별주의자)였던 제임스 얼 레이(복역 중 1998년 사망)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AP통신은 이번 공개 자료가 킹 목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게 될지는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외신에 따르면 킹 목사 유족들은 FBI가 킹 목사를 감시하면서 수집한 성적인 일탈 의혹 관련 내용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될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킹 목사의 자녀들은 성명에서 “이번 파일들은 그 역사적 맥락 안에서 평가받아야 한다”며 “투명성과 역사적 책임성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부친이 남긴 공적에 대한 공격 소재가 될 가능성은 우려한다”고 했다.
이번 기록 공개는 이미 예고된 것이기는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기밀 분류된 킹 목사와 존 F 케네디(JFK) 전 대통령, 로버트 F 케네디(RFK) 전 법무장관 관련 기록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공약했고, 취임 직후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지난 3월 JFK 암살 관련 기록들이 공개됐고, 4월에는 RFK 기록 일부도 공개됐다.
다만, AP통신은 킹 목사 관련 기록 공개가 행정명령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공개 시기 측면에서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미성년자 성범죄자 엡스타인과 관련한 자료 은폐 의혹으로 지지층의 분노를 사고 있는데, 이를 덮으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엡스타인을 둘러싼 의혹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되며 트럼프 대통령을 곤란하게 하는 이슈다. 엡스타인은 미국의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로, 자신이 소유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별장으로 10대 여성들을 유인해 인신매매와 성 착취를 일삼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2019년 8월 감옥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엡스타인은 전 세계 정·재계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고(故)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고(故)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등과 가까운 관계였던 걸로 전해졌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2003년 엡스타인의 50세 생일을 맞아 장난스럽고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려 넣은 편지를 보냈다고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하면서 파문이 더욱 커지고 있다. 엡스타인이 작성한 ‘성 접대 고객 리스트’에 트럼프 대통령이 포함됐다는 소문과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자살한 게 아니라 사주를 받은 누군가에게 ‘타살’당했다는 음모론 등이 얽힌 상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진화에 나섰다. 미 법무부가 지난 7일 “성 접대 리스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엡스타인이 유명 인사들을 협박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고,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18일 법무부에 엡스타인의 연방 대배심 증언을 법원 승인에 근거해 공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 기간 동안 약속했던 엡스타인 자료 전면 공개에는 못 미친다는 평을 받으면서 트럼프 대통령 강성 지지층에서 내부 분열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WSJ의 보도가 나가자 기자 2명과 발행사, 모기업, 모기업 창립자 루퍼트 머독 등을 상대로 100억 달러(약 14조원) 규모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또 미국 백악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해외 출장 취재진에서 WSJ 소속 기자를 배제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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