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봉. 바로 그 이름, 이기호(53)의 소설 곳곳에 등장했던 그 이름이다.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1999)부터, 이시봉이라는 이름은 이기호 소설 곳곳에서 백수, 불량배, 취업준비생, 바바리맨 등 다양한 사람으로 변주되어 등장했다. 어리숙하고 비루한 이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처럼 이야기 한복판에 있었다.

이기호의 신작 장편소설은 제목에서부터 이시봉을 호명한다. 17일 출간된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문학동네) 속 시봉이라는 이름을 받은 캐릭터는 놀랍게도 인간이 아닌 동물, 개다. 이시봉은 화자 ‘이시습’의 반려견이다. 비숑 프리제 이시봉을 데려와 ‘우리집 막내’라 부르며 애지중지했던 아버지는 4차선 도로로 달려든 이시봉을 구하려다 2년여 전 레미콘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이시봉의 잘못이 아니란 걸 머리로 이해하지만 이시봉을 원망하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시습은 내놓고 강아지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는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이시봉은 1년 넘게 미용을 받지 못해 ‘노숙견’ 행색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비숑 프리제 전문 브리딩 업체 ‘앙시앙 하우스’ 소속 브리더가 시습 앞에 나타나 이시봉이 과거 유럽 왕실에서 기르던 고귀한 혈통으로, 세상에 몇 마리 남지 않은 ‘후에스카르 종’이라고 주장한다. 브리더는 시습에게 수천만원을 대가로 제시하며 이시봉을 넘기라고 회유하고, 시습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린 이시봉을 입양해 올 무렵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이시봉의 이름에 얽힌 진실을 마주한다.
소설은 프랑스 출신 개가 시습의 가족이 되기까지의 무수한 사연을 되짚으며 1808년 스페인 민중봉기로까지 시곗바늘을 되돌린다. 왕가에서 기르던 비숑 프리제들은 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가. 그 후손들은 왜 한국 개 농장에 팔렸으며, 어쩌다가 타이어 회사 노조원 출신 시습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가. 망가진 인간은 때로 무릎이 꺾여 주저앉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명랑함과 정직함으로 가득한 강아지는 다가와 꼬리를 흔들고 연약하고 보드라운 털을 들이댄다. 이기호 특유의 유머는 살아 있지만, 웃음 뒤에 마음 저 깊은 데서부터 뭉클함이 올라온다.

이기호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8년째 함께 살고 있는 비숑 프리제의 이름도 ‘이시봉’이라고 소개한다. 소설 속 인물이자 현실의 반려견인 이시봉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22일 서면 인터뷰에서 작가는 반려견 이시봉이 “이번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었다고 회고했다.
―실로 오랜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인데, 소감은.
“지금까지 쓴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의 작품이다. 시간도 가장 오래 걸렸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출간이 되어 있었다. 책이라는 물성으로 만나니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한데도 아직 완전히 그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밤에 계속 그 소설을 써야 할 거 같은 느낌도 들고. 천천히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책 표지의 강아지는 비숑 프리제가 아니라 삽살개같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있는 비숑 프리제들의 헤어스타일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 좋으라고. 한데 관리를 안 하면 그 친구들은 금세 삽살개처럼 된다. 소설 속 비숑 프리제와 똑 닮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것이 2022년이니, 책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거다. 나는 좀 천천히 쓰는 작가다. 원고가 잘 써지거나 속도감이 붙으면 오히려 불안하기도 하다. 그건 그냥 내 스피드이고 내 문장이고 내 목소리일 뿐이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많이 그 친구들의 사정을, 그 친구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자, 계속 그 마음으로 더디게 썼다.”
—작가의 책을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강아지 ‘이시봉’의 이름을 보고 반가움과 놀라움을 느낄 것 같다.
“일종의 ‘이시봉’ 유니버스다. 나는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전부 ‘이시봉’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응 받침으로 끝나는 이름에 대한 애정도 있고. 힘없고 비루하지만 정직하고 가식 없는 친구들의 통칭으로 여기고 있다. 그게 꼭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서,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그게 내 최대한의 애정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 친구 이야기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비인간 서사에서도 당연히 ‘이시봉’ 유니버스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비인간 서사가 지나치게 담론 위주로만, 일정한 패턴으로만 작동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좀 다른 방식으로 가볼 순 없을까? 비인간 존재에게도 개별적인 캐릭터를 부여할 순 없을까? 그 생각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그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왜 실패했을까.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자 위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강아지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성격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제목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도 그런 맥락에서 지었다. ‘명랑’ ‘짧음’ ‘투쟁’ 모두 인간의 관점이다. 그 실패를 제목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작가의 반려견 이시봉은 이번 소설에 어떤 영감과 도움을 주었나.
“이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친구의 부모와 형제를 떠올려보다가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아’나 다름없는 이 친구의 가계도를 만들어 주자, 그게 첫 생각이었다. 또 결말 부분을 쓰는 데만 3년이 걸렸는데, 이래서 작가는 자신과 너무 가까운 모델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대 서유럽 왕가의 사랑과 욕망, 프랑스 혁명사까지 등장하는 폭넓은 서사적 스케일이다.
“당분간 서유럽 쪽으론 여행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됐다. 쓰면서도 계속 후회했다. 차라리 진돗개나 평범한 시고르자브종 이야기를 쓸 걸. 번민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왕가나 귀족 사람들도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다 어느 정도는 비루하고 어리석고 비열했다는 것, 그 정도다.”
—이기호의 작품을 언급할 때 ‘유머’라는 키워드는 빠지지 않는다.
“유머에 대해 생각하면서 소설을 쓰진 않는다. 아직도 유머가 뭔지 잘 모르지만 유머를 생각할수록 점점 더 유머와 멀어진다는 사실 하나는 안다.”

―이번 소설로 독자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이번 작품이 작가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썼다. 우리는 비인간에 대해서 여전히 잘 모른다. 비인간을 떠올릴 때도 우리는 쉽게 인간적 사고의 한계 안에 갇힌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포즈를 취한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솔직하게 그들을 잘 모른다, 인정하는 게 더 나은 태도인 거 같다. 모르는 존재와 공존하려면 당연히 책임이 필요하다. 더 큰 책임을 고민하는 것. 그게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그게 어려워서 여전히 쩔쩔 매고 있기도 하고.”

—소설가이자 문예창작학과 교수, 세 자녀의 아버지이자 병중인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이다. 요즘 일상은.
“생각처럼 그렇게 바쁘거나 정신없지는 않다. 별다른 취미가 없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면 무리 없이 다 해낼 수 있다. 직장도 다른 직장에 비해선 노동의 강도가 높지 않다. 그런 내가 엄살을 부리면 안 된다. 소설을 쓰는 것도 그저 다 생활의 일부분일 뿐이다. 요즈음은 강아지 이시봉과 오래오래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 이시봉은 이시봉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다. 그게 내 유일한 여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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