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헝가리인…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남아
한반도에서 중공군 포로 된 뒤 전우들 보살펴
2005년에야 미군의 최고 영예 ‘명예훈장’ 수훈
오늘날 ‘티보 루빈’(Tibor Rubin)이란 이름의 유대계 미국인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는 전후 미국으로 이주해 미 육군에 입대했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에서 세운 뛰어난 무공이 수십년 뒤에야 인정을 받아 2005년 미군 최고의 영예에 해당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미 국방부는 21일(현지시간) 홈페이지에 게시한 장문의 글을 통해 6·25 전쟁 참전용사 티보 루빈(1929∼2015) 전 상병의 생애를 상세히 소개했다. 오는 25일로 예정된 한·미 간 ‘2+2(경제·통상 장관) 회담’을 앞두고 한·미 동맹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루빈은 1929년 헝가리 북부 도시 파스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9년 나치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킨 뒤 헝가리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헝가리 내 유대인들을 겨냥한 탄압이 본격화하며 어린 루빈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루빈 본인도 14살이던 1944년 3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2차대전 기간 중 유대인 등 12만명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수용소였다. 1945년 5월 미 육군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해방시키며 루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느덧 10대 후반으로 성장한 루빈은 미국인이 되고 싶었다. 당당히 미군에 입대해 자신이 미국에 진 부채를 갚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가 되었다. 1948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루빈은 정육점 등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끈질기게 영어를 공부한 끝에 미 육군 병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2차대전 패전 이후 미군의 점령 통치를 받고 있던 일본으로 보내졌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참전을 결정한 뒤 루빈이 속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은 동해 너머 한국에 급파됐다. 그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돼 한국을 지켰고,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로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미군의 선봉에 섰다.

정권 존망의 위기에 내몰린 북한의 요청에 따라 1950년 10월부터 중공군 개입이 본격화했다. 루빈의 부대는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처음 중공군과 조우했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 자체를 몰랐던 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후퇴했다. 루빈은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당시 그의 모국 헝가리는 소련(현 러시아) 영향권에 속한 공산주의 국가로 변해 있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중공군은 루빈에게 석방을 제안했으나, 그는 “전우들과 함께 포로수용소에 있겠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보병 소총수였던 루빈은 수용소에 있는 동안 위생병과 보급병, 심지어 정훈병 역할까지 도맡았다. 아픈 전우들을 치료하고 그들을 위해 몰래 식량을 조달하며 ‘조금만 참으면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득을 하는 것까지 모두 루빈의 몫이었다. 전후 미군 당국이 파악한 바로는 최소 40명의 미군 병사가 루빈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53년 미군 등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 사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한반도에서 총성과 포성이 멎었다. 합의된 포로 교환에 따라 수용소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간 루빈은 비로소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다만 전쟁 기간 그의 무공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유대인에게 편견과 반감을 지닌 몇몇 간부들이 루빈의 공적을 인정하길 꺼린 탓이다.
1980년대부터 미국 내 6·25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루빈이 세운 공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2005년 9월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루빈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미국에서 민간인 아닌 군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에 해당한다. 루빈은 “진정한 영웅은 끝내 집에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라며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 그의 나이 76세였다. 지난 2015년 12월 캘리포니아주(州)에서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루빈은 로스앤젤레스(LA)의 한 묘지에 묻혔다. 올해는 고인의 10주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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