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어느 거리. 총상을 입은 남자가 공중전화박스 앞에 주저앉아 부인과 마지막 통화를 한다. 그는 숨지고, 모여든 형제들은 큼직한 보스턴백에서 샷건 등을 꺼내 복수의 총격전을 펼친다. 비장한 장면을 어설프나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이들은 ‘장국영을 사랑하는 모임(장사모)’ 회원들. 장국영 기일(4월 1일)마다 벌이는 그들의 성지순례다. 코믹한 장사모의 ‘영웅본색2’ 재현은 소동에 놀란 홍콩 공안(경찰) 출동으로 중단된다.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굿모닝 홍콩’ 속 시대는 2019년. 이미 홍콩을 장악한 중국의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추진에 반대하는 홍콩인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절이다. 동·서양을 잇는 ‘아시아의 보석’으로 자유를 만끽하던 홍콩인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하지만 오로지 불멸의 배우 장국영을 추모하는 데만 진심인 ‘장사모’ 회원에게는 남의 나라 사정일 따름이다. 시위대 없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은 이번엔 장사모판 ‘천녀유혼’을 만든다. ‘아비정전’, ‘패왕별희’,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등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 장국영 출세작이자 우리나라 중·장년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역할 배분을 놓고 투덕거리던 회원들은 추억의 난약사 앞에서 어설픈 코스프레로 가난한 서생 영채신과 불쌍한 처녀 귀신 섭소천, 나무요괴, 도사 등으로 열연한다. 연극만의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젊은 곤륜파 도사가 꿈틀거리며 지둔술을 펼치는 장면에선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온다.
이렇게 오직 장국영만을 기리고 싶은 장사모이지만, 그들의 홍콩 순례는 자꾸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엉킨다. 나이키 운동화 전문 유튜버인 일행 기찬이 경매에서 어렵게 구한 장국영의 손때 묻은 나이키 농구화 한 짝을 시위 현장에서 잃어버리면서부터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철저히 타인이었던 장사모와 홍콩 시위대는 어느 순간 인간적인 공감을 구축한다. 피 묻은 농구화를 기찬과 시위대가 주고받는 순간, 뜻밖의 연대가 만들어진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心)’을 객석에서도 입속에서 무대와 함께 부르며 새삼 ‘우리는 왜 연대해야 하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메이드 인 세운상가’, ‘나쁘지 않은 날’ 등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조명해온 극단 명작옥수수밭은 시야를 나라 밖으로 넓혀 꼼꼼하게 당시 홍콩 사회상을 고증해 무대에 옮겼다. 홍콩 누아르 팬이라면 각별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홍콩 공안 역시 작품 속에서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몰개성한 진압대로 등장하나 극이 진행될수록 입체감을 더한다. 경찰서에 잡혀 온 장사모를 슬쩍 훈방해주는 공안이 등장하고,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 “조국에 충성해야 한다”고 자기끼리 논쟁한다.
그토록 많은 영화에서 시민의 수호자로 활약하던 홍콩 공안은 어디로 갔을까. 홍콩에서 통용되는 광둥어로 논쟁하는 일선 공안에게 공안간부가 베이징 표준어인 만다린으로 “명령에 복종하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으로 ‘굿모닝 홍콩’은 설명한다.


이시원 작가는 “80~90년대 한국은 정치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였고, 홍콩 영화는 자유의 상징이었다”며 “이 작품은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세대가 민주주의와 연대를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창작 작품을 발굴하고 재공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립정동극장 세실의 지난해 지원작이 큰 호평으로 올해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다. 요즘 연극으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인원이 등장하는데 연출가 최원종은 작품 설명회에서 “지난해는 총 19명이 출연했는데 올해는 21명이 출연한다”며 “예산에 작품을 맞춘다는 것을 포기하고 ‘인생을 연극에다 걸겠다’는 마음이다. 더 많은 인원수를 작품에 출연시키고 싶었지만 저와 함께할 수 있는 최대치의 동료들이 21명이었다”고 말했다.


연출가의 뚝심으로 무대 위에 모인 장사모, 공안, 그리고 이리저리 찢기고 상처 입은 시위대가 함께 맞는 ‘굿모닝 홍콩’의 커튼콜은, 서로 다른 입장과 세대를 넘어선 연대와 공감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깊은 울림을 남기는 특별한 순간이다.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4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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