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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인간의 불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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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2-18 22:40:18 수정 : 2022-02-18 22: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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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전쟁·난민… 곳곳서 비극
양심·도덕 사라지면 불행은 계속

한 노동자가 제철소의 용광로에 빠져 사라졌다. 한 생명을 삼킨 그 쇳물을 쓰지 말라고 누군가는 울부짖지만 산업재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광주에서 신축 아파트가 무너지며 건축물 잔해에 깔려 무구한 노동자들이 죽었다. 가족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던 시리아 난민의 세 살배기 아들의 사체가 터키 해안가로 흘러왔다. 해안에 잠든 듯 엎드린 쿠르디의 주검을 보며, 어디에서 비롯된 불행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호메로스 서사시, 그림 형제 동화, 셰익스피어의 희곡, 느와르 영화 같은 서사에는 살인의 백일몽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현실 폭력은 우리의 상상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1994년 르완다에서 100만명이 석 달 동안에 살해당했다. 군인과 부랑자, 시민들이 이 집단 증오에 휩싸인 채 이 미친 집단살상에 가담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유대인 600만명이 가스실에서 사라지고, 일본 군대는 중국 난징에서 30만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을 살해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극에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석주 시인

이런 불행이 상습화한 지옥 같은 세계에 ‘웰빙’과 ‘힐링’ 바람은 얼마나 한가로운 유행인가! 한 일간지는 웰빙 바람을 ‘메가트렌드’라고 했다. 그것은 좋은 삶을 누리자는 달콤한 권유였지만, 그 논의나 길잡이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이어진 ‘힐링’ 바람은 어떨까? 각자도생이란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무한경쟁에서 우리 몸과 마음은 깊은 병이 들었다. 하지만 힐링 유행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기껏해야 위약(僞藥) 효과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불행의 서사는 세상 어디에나 차고 넘친다. 노상강도, 증오범죄, 학교폭력 따위는 나날이 일어난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이 얼마나 진기하고, 괴물 같고, 혼란스럽고, 모순되고, 천재적인 존재인가!”라고 탄식했다. 불행은 우리 안의 괴물들이 저지르는 죄악의 결과다. 가난, 병고, 사고 따위가 개인이 겪는 불행이라면 학살과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 혁명, 유혈폭동 들은 집단의 불행이다. 지금 이 순간도 불행이라는 유령은 세상 곳곳에 서성거린다.

인간은 태어날 때 죽음이라는 불가능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다. 차고 메마른 공기가 갓난아이의 비강으로 밀려들면 갓난아이는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린다. 인간의 태어남은 가학성 폭력이 넘쳐나는 ‘거대한 유혈 아수라장’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사태다. 그렇게 비참하고 야만적이고 메마른 불행의 삶이 시작된다. 폭력과 불행은 늘 한 쌍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유전자에 각인된 불가피한 기질인지도 모른다. 이 잔혹하고 무익한 것이 핏줄과 문화를 타고 세계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왜 인류는 상호간의 폭력을 그치지 않는가? 인류는 언제까지 이런 폭력이 일으키는 불행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가? 분노나 증오 같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들이 우리 안의 도덕 감정이라는 ‘선한 본성의 천사’를 짓누른 탓일까? 선사시대 이래로 인류사에서 폭력이 멈춘 적은 없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데는 한 스푼의 분노로 충분하다. 몇 백만명을 살해하는 데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법이다. 여러 이데올로기와 명분으로 감싼 가학성과 포식성을 품은 우리 안의 악마는 무의미한 살상을 일삼고 세계를 분란과 불행 속으로 밀어넣는다.

지금 우크라이나에는 전쟁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태다. 이 사태가 전쟁으로 번진다면 인명살상 사태가 벌어질 테다. 인류는 놀랄 만한 문명화에 성공했지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안에 도사린 호전성, 복수심, 증오, 집단이기주의 같은 악이 불행의 싹이다. 불행의 씨앗들은 인류가 흩뿌린 피를 먹고 자란다. 불행을 낳는 것도 인간이요, 넘어설 주체도 인간이다. 세계의 거악에 저항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즉 타인의 비극과 불행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양심과 도덕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 불행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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