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본과 한국, 공동의 노력이 양국 국민 간 우호와 미래 협력의 다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도 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속에 극일(克日)을 강조한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와는 달리 올해는 ‘개인의 인권’을 고리로 한·일관계를 풀어보자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한·일 양국이 일본기업 자산 압류와 맞보복 등 극한으로 치닫기보다 현명한 해법을 찾아보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결이 아닌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이 한·일 대화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인 강제동원 문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강제동원 기업인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에 대한 법원의 압류명령이 지난 4일 발효되면서 법적 절차가 시작됐다. 일본제철의 즉시 항고로 일단 제동이 걸렸지만 일본제철 자산을 강제로 팔아 배상금으로 돌리게 되면 양국 간 갈등은 파국으로 내달릴 게 뻔하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실질적 외교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여당 의원들이 반일 감정을 자극해 한·일관계 회복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도 팔짱만 끼고 있다. 진정 일본과의 대화 재개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외무성 간부는 문 대통령 제안에 “대화가 중요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해결에 이를 수 있는 안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일본에 양보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 입장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외려 ‘과거사 역주행’을 한다. 그제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5주년 기념 행사에서 ‘안보는 자력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의 ‘적극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올해는 ‘역사와 겸허하게 마주한다’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새긴다’ 등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베 내각 각료 4명은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과거사에서 비롯한 한·일관계의 얽힌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데는 양국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탓도 크다. 두 나라 관계의 미래보다 당장 눈앞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다 보니 출구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한·일 지도자가 이런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양국 관계 개선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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