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학기 가족 세미나 수업을 수강하는 대학원생 15명 가운데 결혼한 학생 5명에게 물었다. ‘이번 추석에 시댁 다녀왔느냐’고. 5명 중 유일하게 40대 초반의 며느리가 100세 넘으신 시할머니를 봬야 했기에 시댁을 다녀왔다고 답했다. 나머지 4명의 며느리 중 2명은 지방에 계신 시부모께서 ‘차가 엄청 막혀 고생스러우니 내려오지 말라’ 하시어 가까운 친정만 다녀왔다고 했다. 다른 1명의 며느리는 결혼 6개월 차 신혼이라 추석 연휴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왔노라 했고, 나머지 1명은 대학원 공부가 밀려 친정과 시댁 동시에 ‘공평하게 제치고’ 집에 있었다고 답했다.

올해도 지난해 못지않게 추석 명절을 지내는 방식이 가족별로 천차만별 다양해지고 다채로워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며칠 전 만난 40대 초반의 제자는 ‘설날은 시댁 먼저, 추석은 친정 먼저’ 가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5년이 넘었다며, ‘시댁과 친정 번갈아가며 먼저 가는 집이 주변에 제법 많다’고 했다. 시부모 쪽에서 먼저 ‘우리도 편한 것이 좋으니 명절이라고 굳이 내려올 생각 말라’고 하셔서 오히려 서운했다는 이야기도 이젠 익숙하게 들린다. ‘앞으로 한두 세대 지나면 조상 제사는 사라질 것’이라는 문항에 동의하는 비율이 10명 중 4명에 이른다는 일간지 보도도 있었다.
전통적인 부계혈연중심의 친족관계 및 이를 구현하는 가족의례가 빠르게 변형되는 동시에 꾸준히 약화되고 있는 현상을 일컬어 장경섭 서울대 교수는 일찍이 ‘우발적 다원주의’라 이름 붙인 바 있다. 여기서 ‘우발적 다원주의’라 함은 개별 가족 차원에서 구사하는 적응양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측면에서는 다원주의라 할 수 있는데, 다원주의를 향해 갈 때의 원리나 방향이 부재하다는 점에서는 우발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실제로 어느 집에서는 여전히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집에서는 거꾸로 시부모들이 소외와 좌절을 겪기도 한다. 명절과 제사 때마다 4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아름다운 가풍’을 유지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친족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부부와 자식만 똘똘 뭉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몇년 전 싱가포르를 방문한 길에 가족사회학자들을 만나 그곳의 친족관계 및 명절 의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중국계가 다수를 이루는 싱가포르에서는 추석이면 간단한 먹을거리와 과일을 준비해서 가까운 친척을 방문하기는 하지만, 시댁과 친정 중 어디를 먼저 가느냐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조용히 집에 머물러 있어도 흉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침 태국 출신 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어 불교국가인 태국에서는 친족관계가 부계중심이냐 모계중심이냐 물으니, 태국의 친족관계는 실용주의가 기본이라며 웃었다. 가족마다 자신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친족관계를 자유롭게 유지해 간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가족 차원의 ‘다원주의’가 확산되고 있음은 일면 반가운 일이다. 명절에 너나없이 일방향으로 움직이던 민족의 대이동이 소폭이나마 역귀성이나 국내외 여행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음은, 항상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해온 가족의 발자취를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만하다.
다만 ‘우발적’이라는 점은 다소간 우려가 된다. 현재 개별 가족이 시도하는 다양한 적응양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적 가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으로 부정적 요소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례로 20대 싱글 자녀세대가 추석 명절을 기해 가족들이 모였을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언제 결혼할래’와 ‘취직은 했냐’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이런 말들이 듣기 싫어 추석 때 홀로 지내는 싱글이 늘고 있다지 않은가.
20대를 중심으로 특유의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진대, 우리식 개인주의는 그동안 전통과 규범의 이름으로 당연시돼 왔던 가족 및 친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시도가 강하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관행이나 의례에 담긴 의미를 존중하기보다는 이를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임은 진정 반성을 요하는 일이 아니겠는지.
젊은 세대일수록 과거에 비해 고부갈등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우리 귀를 솔깃하게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불필요한 소모적 갈등을 해소하는 쪽으로 승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며느리 머릿속에 시어머니가 점차 사라짐’으로 인해 갈등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데 이르면, 이제 ‘고부갈등의 시대는 가고 장서갈등의 시대가 왔다’는 우스갯소리에도 마음이 쓰이곤 한다. 이 경우에도 관계의 단절 및 무관심이 갈등을 덮는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 변화하는 친족관계에 걸맞은 새로운 유형의 고부관계가 정착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기에 드는 생각이다.
이제 우리네 가족도 옛 규범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규범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아노미’ 상태를 극복하고, 다수의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가족 가치와 규범이 공고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우발적 다원주의 대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족 구성원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각자의 입장을 배려하기, 가족을 향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헌신과 양보를 공유하기 등이 변화의 원리이자 방향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도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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