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이 힐러리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소도시나 시골, 산간 지방에서 소형 버스를 타고 다니며 유세를 하고 있기에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을 뿐이다. 힐러리 캠프가 빌에게 준 임무가 바로 유세전의 사각지대를 챙기는 것이다. 힐러리 캠프는 선거전이 막바지에 치달음에 따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와 경합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진보의 아이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거물을 대규모 유세현장에 집중 투입하고 있다. 빌은 이들이 가지 못하는 경합주의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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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록키마운트에서 아내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왼쪽)이 한 참석자와 사진을 찍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AP연합뉴스 |
빌이 유세전의 전면에 나서면 힐러리에게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게 힐러리 캠프의 판단이다. 힐러리가 남편에 편승해 다시 백악관을 차지하려 드는 것 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음담패설과 성추문이 선거전의 이슈로 불거진 것도 빌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트럼프는 줄곧 클린턴의 성추문을 물고 늘어진다. 트럼프는 자신이 음담패설을 했을지 몰라도 빌은 실제로 연쇄 성추행을 했다며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다. 힐러리도 남편의 과거사가 껄끄러워 트럼프의 성추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빌이 뛰어난 웅변가이지만 약 20년 전 자신의 재임시절 업적을 늘어놓기를 좋아해 힐러리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전국민 건강보험 제도인 오바마케어가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가 트럼프 캠프에 공격 소재를 제공하기도 했다.
빌이 유세전에서는 뒷전에 밀려나 있지만 힐러리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조용히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시사종합지 뉴리퍼블릭 최신호가 보도했다. 꼬리를 내리고 있던 공작새가 백악관에 가면 활짝 날갯짓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 잡지가 지적했다. 빌이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힐러리의 초특급 참모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힐러리도 최근 유세에서 “빌이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여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 특정 외교현안을 전담하는 특사를 맡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빌이 현직에서 떠난 뒤에 설립한 클린턴재단을 운영하면서 줄곧 외교 경험을 축적해 왔다. 빌이 백악관에 있으면 국정 개입으로 구설에 오를 수 있어 아예 이스라엘대사 등 특정국 대사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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