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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지 갈등’ 전쟁이냐 화합이냐 기로에

입력 : 2014-12-02 20:24:08 수정 : 2014-12-02 20: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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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천주교, 폐사지 사용 마찰에 종교계 긴장 산골짝 오지의 한 폐사지가 불교와 가톨릭 간 갈등 공간으로 비쳐져 종교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문제의 폐사지는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앵자봉 중턱에 자리 잡은 주어사(走魚寺) 터다. 한 승려가 절터를 찾던 중 잉어를 따라가던 꿈을 꾸고 세웠다는 주어사는 빈터만 남아 경기도 광주 천진암과 함께 ‘한국 천주교 발상의 요람지’로 알려져 있다. 즉, 한국 천주교가 신앙공동체로 발전되기 5년 전인 1779년(정조 3년) 권철신, 정약전 등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천주교 강학을 했던 장소다. 현재 천주교 행적을 근거로 여주시가 시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주어사지가 불교와 천주교 간 갈등으로 비화한 것은 지난 9월. 최덕기(전 수원교구장, 산북공소 사목) 주교와 산북 공소(작은 성당) 신자들이 천주교 순교자성월을 맞아 주어사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계획하고 답사차 왔다가 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 신도회에서 설치한 연등 수십 개와 ‘주어사 원형 복원을 위한 발원기도’ 문구가 적힌 현수막 2개를 발견하고부터다. 산북공소 측에서 용주사 신도회에 “천주교에서 곧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니 연등과 현수막을 떼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신도회가 “연등을 떼는 것은 곤란하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연등 옆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속상한 상태에서 미사를 봤음 직하다.

천주교 측에서는 “특정종교를 상징하는 시설물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연등을 거둬 가는 게 맞다”는 것이고, 불교 측에서는 “사찰이 있었던 자리에 연등을 다는 게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고 주장해 서로 입장이 팽팽하다.

이 사실을 놓고 교계 언론에서도 “천주교에서 연등에 대한 철거를 요구해 물의를 빚고 있다”(불교신문),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가 연등을 설치해 논란이 일고 있다”(평화방송)며 즉각 대립각을 세웠다.

경기도 화성 용주사 스님과 신도들이 주어사지에 연등과 ‘주어사 원형 복원 발원을 위한 1000일 기도’ 현수막을 걸고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등이 부착된 것은 주어사 원형복원 발원 1000일 기도를 시작한 지난 7월 6일부터이니 갈등은 훨씬 전부터 불거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많은 폐사지 가운데 주어사지에 애착을 갖는 것은 주어사가 광주 천진암처럼 천주교 기념공간으로 바뀌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에 있었던 사찰 천진암 역시 천주교 강학 장소로 쓰였다. 정확한 사료는 없으나, 불교계에서는 주어사와 천진암이 시기적으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해 천주교 박해와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천진암터는 천주교 측의 노력으로 오늘날 천주교의 중요한 성지가 됐다. 현재 이곳에는 정약종, 이승훈, 이벽, 권일신, 권철신 등 한국천주교 창립성인 5인묘역과 가르멜여자수도원, 한국천주교 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으며, ‘한민족 대성전’이 건립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 외에 사찰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불교계의 서운함이다. 

천주교 산북공소 성직자와 신자들이 연등과 현수막 등이 내걸린 주어사지에서 순교자성월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이 때문일까. 천주교는 산북공소 차원에서 주어사지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정도지만, 용주사 신도회 측은 주어사 복원 불사 계획을 수립하고 재정을 모으는 등 보다 적극적이다.

민학기 용주사 신도회장은 “당시 천주교 박해 때 스님들도 수난당하지 않았다면 멀쩡한 절이 갑자기 폐사될 리 없다”며 “1699년(숙종 24)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어사 터에 있던 해운당대사(海雲堂大師) 비(碑)를 천주교에서 절두산 성지로 가져간 것은 절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주어사지를 복원하려는 것은 그 안에 천주교 기념관도 조성해 종교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취지”라고 덧붙였다.

연등도 납득이 안 되는 마당에 불교계에서 주어사 복원을 밀어붙인다면 천주교에서도 좌시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5개의 전각 흔적이 확인된 주어사지는 현재 산림청이 소유하고 있으며, 한때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등이 주어사지 성역화를 추진했지만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불자들의 자발적 결사모임인 ‘붓다로 살자’는 지난달 25일 조계종 전법회관 3층 회의실에서 ‘주어사 문제의 종교평화적 해법 모색’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공간의 복원이 아니라 역사의 복원이 중요하며, 불교와 가톨릭이 종교평화의 공간으로 함께 가꿔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날 토론회는 비록 공식적인 종단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았으나 제3자인 종교학자와 일간지 기자를 비롯해 불교계 인사와 천주교 인사가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주어사지가 불교 대 가톨릭 간 ‘종교전쟁’의 격전지가 될지, 한국 종교사에 새로운 종교화합의 금자탑을 세우는 명소가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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