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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 '져주기'…선수 '마녀사냥'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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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03 11:43:19 수정 : 2012-08-03 11: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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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기에 한 두 번 나올까 말까 한 서비스 폴트로만 초반에 4점, 3점을 잃습니다.

심판이 옐로카드, 레드카드를 내밀며 주의를 주지만 양쪽은 '지기 위한' 팽팽한 싸움을 이어갑니다.
관중의 야유를 받고 급기야 '실격'을 당할 수도 있는 블랙카드가 등장하자, 이번에는 공을 주고받으며 끝나지 않는 랠리를 이어갑니다. 73, 74, 75….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고의성 패배' 의혹으로 실격 당한 여자복식 한국 하정은·김민정(하김조) 대 인도네시아 폴리·자우하리 조의 경기 내용입니다.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왕샤올리와 위양이 자국과의 4강전을 피하기 위해 조 2위로 본선에 진출하면서, 본선 토너먼트 대진표는 복잡해졌습니다. 본선 진출을 확정한 상황에서 조 1, 2위를 겨루는 마지막 조별예선을 펼친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이기면 불리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앞서 한국의 정경은·김하나(정김조)가 중국 왕샤올리와 위양의 무기력한 경기 내용에 항의했지만, 심판은 당시만 해도 사실상 눈을 감았습니다. 그 도미노가 한국의 하김조와 인도네시아 경기까지 영향을 줬고, 그 내용이 너무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죠.

너무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에 화가 나는, 그래서 용서할 여지가 없는 게임. 그것이 바로 보이는 것의 함정입니다.

남이었으면 실컷 비웃고 욕하고 야유를 퍼부었을 그 경기에 한국인이 뛰고 있었으며, 게다가 두 팀이나 연루됐으니 국민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억울한 오심으로 메달을 빼앗긴 펜싱의 신아람, 예선 탈락 위기를 딛고 은메달을 목에 건 수영의 박태환을 거론하며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배드민턴에 강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한국 배드민턴 여자복식조를 두둔한다면 이렇습니다.

다른 종목과 달리 여자복식에서 중국은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특히 세계랭킹 1위인 왕샤올리와 위양은 물론 이길 수도 있겠지만, 세계 그 어느 나라의 누구라도 피할 수 있다면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상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배드민턴세계연맹(BWF)가 올해부터 '넉아웃' 제도인 토너먼트가 아닌, 조별리그로 규정을 바꾸면서 한번쯤 져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조 1위와 2위를 택할 수 있는 빈틈까지 내어줬습니다. 선수들에게 심적 부담감을 덜어주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조별리그는, 사실상 지난 올림픽 때 '이변'으로 탈락해버린 정재성·이용대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게 아닐까란 추측을 하게 됩니다. BWF의 회장이 바로 한국인이거든요.

이 토너먼트제도는 애당초 배드민턴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나라에서 두 팀이 참가할 수 있는(복식의 경우 세계랭킹 8위 안에 들면 2팀까지 가능) 배드민턴은 축구나 야구, 농구 같은 다른 구기종목의 연장선 상에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별리그를 하는 모든 종목들은 한 국가에 오로지 한 팀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배드민턴은 자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이 페어플레이를 했더라면, 그게 한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을 되돌려 한국이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쳤다면, 예상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한국의 정김조는 중국과의 경기에서 그들이 '져주기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평소의 왕샤올리·위양과는 다른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정김조 만큼은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최선을 다해 중국을 맞서 싸웠다면? 왕샤올리와 위양 역시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져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이기는 게임을 하게 되면, '져주기 게임'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21대 0으로 지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던데, 만일 중국의 의도대로 정김조가 움직였더라면 중국은 21대 17, 21대 12 정도로 타당한 패배를 했을 것입니다.

이어 하김조 역시 '그냥 중국과 정정당당하게 맞서자'는 마음으로 페어플레이를 했더라면? 인도네시아 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식으로 지면 되는 겁니다. 어느 한 쪽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겨주는데' 굳이 티 나게 지는 게임을 할 필요가 없겠죠.

역시 '져주기 게임' 의혹을 받고 있는 일본의 경우, 상대팀은 이겨야 하고 일본은 지고 싶은 욕구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고의성 패배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또 다른 복식조인 톈칭과 자오윤레이를 피하기 위해, 일본이 조 2위를 하기 위한 경기를 한 것으로 의심되지만 반드시 경기에서 이겨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대만으로서는 일본의 져주기 게임이 오히려 감사했을 테니까요.

일본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제재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정김조, 하김조가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페어플레이를 했더라면, 일본과 대만과의 경기처럼 물증이 없는 상황이 됐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중국은 자국 선수들의 랭킹포인트를 조절하기 위해 '져주기 게임'을 해왔습니다. 세계랭킹 1~4위 안에 들면 추가로 한 명을 더 올림픽에 참가시킬 수 있는 규정 때문인데요. 랭킹을 조절하기 위해 자국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담합에 의해 한 쪽이 지거나 하는 경우를 BWF는 사실상 묵인해 왔습니다. 쌍방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고의성 패배' 의혹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셈이었죠.

그러나 이번 런던올림픽처럼 '쌍방이 서로 지고자 하는' 경기는 처음입니다. 한 나라에 두 팀이 포함되는 배드민턴에서, 동시간대 마지막 조별예선을 펼쳐 각국의 꼼수를 막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BWF의 잘못이 큽니다.

게다가 BWF는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조별리그 랭킹 1위와 최하위가 첫 번째 경기를 해야 한다는 룰을 어겨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제재를 받고, 경기 바로 전날 대진일정을 싹 바꿔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전례도 있습니다. 조별리그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조차 갖추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BWF가 그 동안 묵인해온 져주기 게임은 선수들에게 '도덕 불감증'을 줬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가 너무나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묵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을 만든 것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중국의 세계1위 왕샤올리·위양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입니다. 예기치 않게 조 2위를 하면서 모든 것이 꼬여버린 톈칭·자오윤레이 때문에, 아마도 감독과 코치진의 결정이었을 '져주기 게임'을 해야 했던 왕샤올리와 위양.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금메달을 박탈당한 세계최강 복식조는 위양의 은퇴 선언과 함께 해체됐는데요. 그녀는 "BWF가 매정하게 우리의 꿈을 깨버렸다"면서 배드민턴계를 떠났습니다.

여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 한국의 하김조, 정하조. 상대와 마찬가지로 '져주기 게임'에 가담했지만, 그들은 결국 져주기 게임에서조차 패했습니다. 서로가 지고 싶은 경기에서 이겨버리고, 게다가 실격까지 당하게 된 두 여자복식조. 비난과 함께 따뜻한 격려를 해주면 안 될까요.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인 BWF가 과연 선수들에게 '실격'을 줄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모든 화살이 선수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책임을 떠넘긴 채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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