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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美 OSS에 항일투쟁 '한국그룹' 있었다…함용준 등 80명 활약

입력 : 2008-09-09 10:41:33 수정 : 2008-09-09 10: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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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첫 요원 모집… 1946년까지 활동

본지, 美국립문서보관소서 공식 확인
◇H H 언더우드의 OSS 요원 서류. 직위가 현장대표(Field Representative)로 표기돼 있다.
워싱턴=한용걸 특파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이 1945년 일제 저항운동을 확산할 목적으로 한국그룹(Korean Group)을 조직했으며, 함용준 박사 등 한국계 인사 다수가 참가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세계일보가 최근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공개한 OSS 요원 명단을 분석한 결과, OSS는 창설 초기인 1942년부터 한국계 요원을 모집해 1946년까지 임시직을 포함해 80여명을 채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OSS는 산하 극동작전국(FETO)과 중국에서 활동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동양인을 모집하면서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던 한국계 인사들을 대거 선발했다.

연세대 전신인 조선기독학교 3대 교장인 H H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1945년 6월부터 지역대표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아들인 H G 언더우드(원일한) 미 해군 중위도 OSS에 지원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 박사는 1942년 9월 요원 후보 8명을 추천하는 등 OSS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이 박사의 비서였던 장기영씨와 장석윤 전 내무장관은 OSS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다.

예일대 출신으로 하버드대 등에서 강의했던 함 박사는 1945년 9명으로 구성된 OSS 한국그룹 등을 이끌고 중국에 파견됐다. 함 박사와 서상복, 피터 김 등은 1945년 8월 한국에 억류된 연합군 포로 석방을 위해 C-47기를 타고 침투하다 항공기가 불시착하자 통역전문가로 나서 요원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공로로 미 정부로부터 군인장(Soldier’s Medal)을 받았다.

오하이오 웨슬린대 출신 윤기승과 미군정보서비스(MIS)어학교 출신 강한모, 조종익, 박기북 등도 OSS에서 근무했다. 중국의 OSS지부가 채용했던 인사들은 이번에 명단이 공개되지 않았으며 앞으로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워싱턴=한용걸 특파원

icykar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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