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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OSS 한국요원 명단 분석…日語통·번역, 감청 맡아

입력 : 2008-09-09 09:45:27 수정 : 2008-09-09 09: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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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립문서보관소 공개 OSS 한국요원 명단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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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략정보국(OSS)은 2차 세계대전 때 중국과 한국 지역에서 일본에 대한 교란작전을 펼치기 위해 극동작전국(FETO)을 설치하고 한국 요원들을 선발했다. 1942년 창립 초기에는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계 인사들이 미 육군과 해군, 공군 등에서 차출됐다.

◆한국계 요원들=초기 한국 요원들의 임무는 일본어 통역 및 번역, 일본 무선 감청 등이었다. 강한모는 미 육군 통신부대 출신으로 1944년 9월 일본 무선감청 목적으로 OSS에 차출됐다.

조선기독학교(연세대 전신) 출신 윤기승은 일본어 및 중국어 통번역 및 현장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을 무대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점 조직원으로 움직였다.

1943년 9월부터 전쟁부 언어부대에서 근무했던 곽충순은 부부가 일본 우편물을 검열하는 작업을 했다. 조선기독학교 출신인 그는 H H 언더우드 박사와 친분이 있다고 밝혔으며, 전쟁부에서 한영사전 및 영한사전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전조셉(육군 사병)은 하버드대에서 일본어 훈련을 받다가 OSS 극동작전국으로 차출됐다.

군부대 밖에서 선발된 요원들은 상당수가 독립운동을 염두에 두고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가정주부와 이발사 등도 OSS에 지원해 독립운동 열기를 보여줬다. OSS 인사서류에 첨부된 신원 검열 보고서에는 ‘일본에 대한 불만’이라는 항목이 첨부돼 있어 반일 정서가 한국 요원들의 선발 기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종 선발된 한국계 OSS 요원들은 상당수가 신학교 출신 등 고학력 인사들로 재미 독립운동단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1942년 9월 워싱턴 대한민국 구미위원부(의장 이승만)가 OSS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이 박사가 추천하는 인사 8명을 포함해 9명의 이력서를 보내며 “이로써 모두 23명의 이력서를 제출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이 박사의 추천을 받아 OSS에 지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박사의 비서였던 장기영씨는 미네소타주 새비지에 있는 군정보서비스(MIS) 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번역가로 채용됐으며, 1942년 12월에는 극비 해외방문 허가를 받아 활동했다.

김태춘은 YMCA 및 신간회 회원으로 이 박사의 추천을 받아 OSS에 지원했다.

◆OSS 이색인물=조선기독학교 3대 교장이던 H H 언더우드(원한경) 박사는 1942년 9월 조사·평가 컨설턴트로 채용됐으며, 요원 후보자를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현장 대표’로 채용됐으며, 연봉은 4300달러로 당시로는 거액이었다. 그는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파견돼 현장을 조사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OSS 정보보고에 따르면 그는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 일제에 호의를 보여 ‘효과적인 요원이 되지 못하며 연합점령군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해군 장교인 H G 언더우드(원일한) 박사는 OSS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와 동생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지휘관이 거부한다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했다. 김하태 전 목원대 총장도 1942년 6월 OSS에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됐다.

워싱턴=한용걸 특파원

icykar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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