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가을,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6·25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회담은 포로 송환 문제로 벽에 부딪혀 10월 초 중단되었고, 전선은 다시 포연에 휩싸였다. 먼저 움직인 것은 공산군이었다. 중공군은 국군 9사단이 방어하던 철원의 395 고지를 공격했으나, 국군은 그 파상 공세를 끝내 막아냈다. 이것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이다.
같은 시기, 유엔군도 공격에 나섰다. ‘쇼다운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작전의 목표는 철의 삼각지대를 감제하는 공산군의 핵심 요충지인 오성산을 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것이었다.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 미 7사단은 그 서쪽의 삼각고지 공격을 맡았다.
10월 14일, 유엔군은 막대한 양의 포병 및 공중 화력을 쏟아부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대규모 포병 화력을 운영하며, 1년 이상에 걸쳐 구축한 ‘지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진지 방어 체계를 통해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국군과 미군의 피해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특히, 자국 여론의 악화로 인해 미군은 철수를 고려하게 되었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작전을 중단하고자 했지만,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국군 혼자라도 남아 싸워 스스로의 승리를 이뤄내어 국군이 패배감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투는 무려 42일 동안 이어졌고, 양측의 사상자는 약 2만5000명에 달했다. 단일 전투로는 6·25전쟁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전투였다. 국군은 처절한 전투 끝에 비록 삼각고지는 내주었으나 저격능선의 주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절반의 성공으로 보이는 이 전투는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다. 같은 시기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가 국군의 대표적 승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것도 그 이유로 보인다. 반면 중국은 이 전투를 ‘상감령 대첩’이라 부르며 영화와 노래 등을 통해 대중의 기억 속에 승전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 전투는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될 전투였다. 국군은 전투 과정에서 포병 화력 운용과 진지 점령 후 방어 등 전술적 측면에서 뚜렷한 발전을 이뤄냈다. 또한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해 그들의 공세 의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유엔군이 전세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전투 중반 이후 국군이 미군의 책임 지역을 인수해 끝까지 싸운 모습은 6·25전쟁 후반기 국군이 전쟁의 주체로 부상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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