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라다크를 여행중인 필자와 현지 소년.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 <낯선 곳> 高銀
삶은 여행길이다.
설혹 異邦의 지역에 나가서 떠돌아다니는 일도 있겠지만 인생 자체가 시간에 실려 흘러가는 여행길이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정도라면 여행은 별 의미가 없으리라.
여행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빚어지는 땀과 고통,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가는 순발력, 그리고 깊은 사색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합체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 또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동안 많은 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진한 삶을 많이 느낀 셈이다.
나를 主宰하는 마음은 낮선 곳, 낮선 땅에서도 새벽기차를 타고 가 맞는 상큼한 아침과 적당한 여독(旅毒)을 즐길 줄 알았다.
나의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휩쓸리지 않고 나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딪히는 숱한 고통과 난관을 혼자서 막막하게 삭혀야했던 경우도 많았다.
짐을 싸고 배낭을 꾸리는 일은 항상 외로움과 함께 한다.
남들이 자고 있고 남들이 쉬고 있을 때 짐을 꾸리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외롭기 때문에 떠났고, 떠났기 때문에 더욱 외로웠다.
그 뼈저린 외로움은 나의 발길을 멈추지 않게 하는 활력소이기도 했다.
여행은 80%이상의 苦와 20%이하의 樂의 어울림.
우리 옛사람은 죽장망혜(竹杖芒鞋)가 나그네 길의 기본이었다면 지금은 시절이 좋아도 한참 좋아진 셈이다.
‘왜 山에 오르느냐’는 질문처럼 ‘편안한 집 떠나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는 질문은 크게 차이가 없다. 여행은 80%이상의 괴로움과 20%이하의 즐거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그러한 고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의 기본자세이다. 고생을 즐긴다는 것은 정신이상적 아이러니 같은 것이다.
지극히 거시적이고 피상적일 때는 여행은 낭만적으로만 다가온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현실로 다가왔을 때 여행은 실존적 고행의 길이 되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샤르트르>.
여행을 갈려니 어디를 어떻게 언제 가야할지 망설여지고 신경을 써야하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간과 코스와 경비를 뽑고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여행은 미완성에서 완성을 향해 가는 영원한 길일 뿐이다.
완벽을 꿈꾸는 사람은 절대 여행에 입문할 수 없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최선이 아니면 차선으로, 最惡보다는 次惡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순발력을 살려서 극복해 나가야한다.
殼(껍질 각)을 깨는 것이 覺(깨우칠 각)이다!
세상 만사 부수면서 깨어난다! 그래서 여행 수칙 제 1번은 “일단 저지르라”이다. 이 말은 나의 길들여진 습관과 생활 범주를 ‘깨야한다’는 말이다.
‘깬다’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이다. 새는 알에서 깨어서 또 다른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과정이다. 도를 닦으면서 ‘깬다’는 것은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감이다. 이런 높은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깨야한다. 이것이 ‘깨우침’이다.
진정한 여행도 깨야 가능하다. 깨지지 않는 곳에 진보란 없다. 그러나 깨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시련이 필요하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산과 들 자연을 찿아 떠났다. 그러한 만남 속에서 순수한 자연과 나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은 험하건 부드럽건 나를 충만케 하였고 원초적인 자극을 선사하였다. 殼(껍질 각)을 깨는 것이 覺(깨우칠 각)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