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밤 서울 용산경찰서 폭력팀 사무실.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사를 받고 있는 실직자 정모(49)씨 옆에는 대형마트 식품매장에서 훔친 떡 한 팩과 참치김밥 한 줄이 놓여 있었다.
정씨가 집을 나선 것은 지난 5월. 퇴직당한 뒤 재취업이 안 돼 허송세월하던 정씨는 더 이상 가족을 볼 면목이 없다며 무작정 가출했다. 그는 서울 용산역 근처의 한 여관에 머무르며 일자리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4일 저녁,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용산역 근처 대형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지하 2층 식품매장에서 떡과 김밥 한 팩씩을 훔쳐 나오던 정씨는 CCTV로 매장 안 상황을 지켜보던 보안요원 조모(25)씨에게 적발돼 현행범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한때는 건실한 중소기업의 직원이자 가장인 정씨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9년 외환위기 때다.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회사 사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정씨에게 재취업의 벽은 높기만 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렇게 허송세월한 지 8년이 됐다.
정씨는 경찰에서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지만 “제발 가족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경찰은 “두 달 만에 이런 일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가장의 마음이 어떻겠느냐”며 정씨의 부탁을 들어줬다. 경찰은 이날 정씨를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조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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