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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 주 세르비아 대사 |
세계 제1차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역사적 사건이다. 프린치프라는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한 이 사건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고, 독일이 참전하면서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된다.
당시 신생 국가이던 세르비아의 청년들은 민족주의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당면 과제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웃 보스니아를 차지하는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오스트리아가 먼저 보스니아를 합병해 버리자 세르비아인들은 큰 좌절과 분노를 가지게 되고, 결국은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어떻든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얻게 됐다. 1차대전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와해되면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는 물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까지 합병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고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민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글자 그대로 남방(유고)의 슬라브인들을 모두 통합한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였다.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1990년대 초,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의 결실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이라는 가장 추한 형태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철권을 휘두르던 티토가 사망한 이후 중앙 정부와 마찰을 빚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가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측과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따르게 된다. 끝내 밀로셰비치 정부는 1999년 코소보의 독립운동을 무참히 짓밟다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세르비아를 79일 동안 폭격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민족주의란 한 핏줄, 한 문화, 하나의 언어를 가진 같은 민족끼리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면서 살겠다는 숭고한 이상이다. 반면 제국주의는 자신의 의지를 타민족에게 강요한다는 면에서 민족주의와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투르크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운명을 개척하려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이상은 자국 내부의 소수 민족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해서는 제국주의라는 다른 쪽 얼굴을 드러내었고, 결국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이루려 했던 민족주의의 이상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세르비아인들이 민족주의 망상에 집착하는 동안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세르비아와 국민소득이 비슷했던 헝가리가 꾸준한 성장과 변화를 이룩한 지난 15년이 세르비아에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고, 앞으로 세르비아가 헝가리처럼 EU 가입의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편협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개혁과 개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 당면과제다.
베오그라드에는 아직도 5년 전 나토 폭격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내 중심부 밀로시가에 위치해 있는 외교부를 들어갈 때마다 폭격을 맞아 한가운데가 뚫린 채로 방치되어 있는 길 건너편 국방부 건물을 다시금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열정에 들뜨게 하는 민족주의의 이상이 이성과 자율로써 통제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김수동 주 세르비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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