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전쟁터 나가자 아내 두 아들 키우며 포도밭 지켜
돌아온 남편, 아버지가 일꾼으로 일하던 밭 사들여
1949년 생테밀리옹에 ‘샤토 투르 그랑 포리’ 설립
반세기 가까이 끄떡없는 놀라운 숙성 잠재력 지녀
2016년 빈티지 국제 콩쿠르 91점 더블 골드
“2025년 9월, 친구의 쉰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날을 위해 아껴둔 1976년산 매그넘을 열었습니다. 친구가 태어난 무렵의 와인이 반세기를 건너와 우리 식탁에 오른 거죠. 이 한 병이 증명합니다. 이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좋은 와인을 만들어왔다는 것을요.”
구글 맵에 한 와이너리를 검색하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리뷰가 나옵니다. 그중 크리스텔 그낭(Christelle Guenant)이 올린 리뷰 내용입니다. 50년을 거뜬히 버티는 와이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런 놀라운 숙성잠재력을 지녔을까요. 그가 열었던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 우안을 대표하는 생테밀리옹(Saint-Émilion)에서 샤토 투르 그랑 포리(Château Tour Grand Faurie)가 만드는 와인입니다.
◆노동자의 땀이 그랑 크뤼가 되기까지
생테밀리옹에서 4대째 포도를 키우고 와인을 만드는 페티(Feytit) 가문의 스토리는 19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 땅의 이름은 ‘클로 그랑 포리(Clos Grand Faurie)’였고 주인은 뒤소(Dusseaut) 가문이었습니다. 지금의 주인인 페티 가문의 증조부모는 이 농장에서 묵묵히 포도밭을 일구던 노동자였습니다.
19세기 말 보르도 포도밭을 휩쓴 필록세라와 경제 위기로 많은 가문이 흔들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피에르 페티(Pierre Feytit)는 프티 발(Petit Val)에 첫 포도밭을 사들이며 자기 땅을 갖게 됐습니다.
남의 밭을 일구던 노동자가 처음으로 손에 쥔 땅이었습니다. 모래 섞인 점토와 점토석회 토양이 어우러진 프티 발은 생테밀리옹 마을 북쪽에 있는 작은 땅 리외디(lieu-dit) 이름으로, 세월이 흘러 현재는 그랑크뤼 와인이 생산되는 곳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한결같이 밭을 지켜온 피에르의 일솜씨는 고용주였던 뒤소 가문도 알아봤습니다. 뒤소 가문은 그에게 생조르주 생테밀리옹(Saint-Georges Saint-Émilion)의 필지를 추가로 넘겨줬습니다. 주인과 일꾼 사이에 쌓인 수십 년의 신뢰가 한 가문의 운명을 바꾼 셈입니다.
1936년, 피에르의 세 아들 중 막내 제라르 페티(Gérard Feytit)가 포도밭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요. 아내 엘리자베트(Elisabeth)와 함께 밭을 일군 지 3년째, 포도알이 검붉게 익어가던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수확을 코앞에 둔 포도밭에서 제라르는 전지가위를 내려놓고 군복을 입었습니다. 밭에는 엘리자베트와 어린 남매 장(Jean)과 크리스티앙(Christian)만 남았습니다.
이듬해 여름, 보르도는 독일군 점령지가 됐습니다.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마을에서 엘리자베트는 아이들 손을 잡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는 언 손으로 가지를 쳤고, 가을이면 아이들과 함께 포도를 땄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남편을 기다리며 그는 한 해도 밭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라르가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향하던 그를 맞은 것은 아내가 홀로 지켜낸 포도밭이었습니다. 다시 전지가위를 든 제라르는 더 큰 꿈을 꿨습니다. 증조부모가 남의 일꾼으로 땀 흘리던 바로 그 땅, ‘그랑 포리’를 사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1949년, 그랑 포리의 집과 양조장, 그리고 몇 ha의 포도밭으로 ‘샤토 투르 그랑 포리’가 정식 출범합니다. 아버지가 일꾼으로 일하던 땅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가문은 지금도 엘리자베트가 밭을 지킨 시절을 끈기와 땅에 대한 애착의 역사로 기억합니다. 이후 가문은 1960년대부터 주변의 좋은 필지를 하나씩 사들이며 포도밭을 키웠고, 발효실을 새로 짓고 양조장도 넓힙니다.
◆세계유산과 함께 열린 남매의 시대
1999년은 생테밀리옹에 특별한 해였습니다. 중세 마을과 그 주변 포도밭 경관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해입니다. 바로 그해 샤토 투르 그랑 포리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졌습니다. 제라르와 엘리자베트의 손주인 이자벨 페티(Isabelle Feytit)와 프랑크 페티(Franck Feytit) 남매가 와이너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남매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과감하게 바꿨습니다. 낡은 장비를 현대화하고 판로를 넓혔습니다. 세계유산이 된 생테밀리옹 마을 가데(Guadet) 거리 16번지에는 직영 매장도 열었습니다. 2021년에는 유기농 전환을 시작하면서 온라인 매장을 열었고, 2024년 마침내 유기농 인증을 받았습니다. 가족이 직접 포도를 키우고 와인을 만드는 프랑스 독립 와인생산자 연합 ‘비뉴롱 앵데팡당(Vignerons Indépendants)’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포도밭은 생테밀리옹 마을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지금은 약 16ha에 이릅니다. 토양은 철분 흔적이 섞인 모래와 점토석회, 점토실트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메를로를 중심으로 카베르네 프랑과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합니다.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50년에 이릅니다. 올드 바인은 열매를 적게 맺지만, 그만큼 한 송이 한 송이에 맛이 꽉 들어찹니다.
2026년에는 포도밭 한가운데에 숙소 ‘르 마뇰리아(Le Magnolia)’도 문을 열었습니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머물며 양조장을 둘러보고 가족과 함께 와인을 맛봅니다. 일꾼의 땀으로 시작한 땅이 4대를 거쳐 세계 각지의 손님을 재우는 집이 됐습니다.
◆밭에서 잔까지, 가족의 손으로 빚는 정직한 와인
샤토 투르 그랑 포리의 양조 철학은 화려한 수식보다 정직함에 가깝습니다. 가문이 내건 가치는 진정성, 엄격함, 친근함, 그리고 열정입니다. 소유주 가족이 직접 포도를 키우고 와인을 빚으며, 손님을 맞아 와인을 파는 일까지 맡습니다. 와인을 사는 것은 곧 한 가족과 한 장소, 그리고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만나는 일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포도는 모두 손으로 수확해 꼼꼼히 골라내고, 구획마다 가장 좋은 송이만 남깁니다. 발효는 콘크리트 탱크에서 정밀하게 관리해 과일 본연의 맛과 구획마다 다른 개성을 잘 지켜냅니다. 숙성은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해 와인에 구조감과 우아함을 입힙니다. 유기농 전환도 같은 맥락입니다. 와이너리는 떼루아를 지키고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며, 더 자연스럽고 표현력 있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고 설명합니다. 남매는 우아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샤토 투르 그랑 포리 와인
샤토 투르 그랑 포리 와인은 프랑스 와인 전문 수입사 비나로마에서 수입합니다. 현재 국내에는 생테밀리옹 그랑크뤼와 클로 그랑 포리 2종만 수입되고 있습니다.
▶샤토 투르 그랑 포리 생테밀리옹 그랑크뤼 2016(Château Tour Grand Faurie 2016)
가문의 이름을 내건 간판 와인입니다. 잘 익은 블랙체리와 흑자두 향이 먼저 반깁니다. 잔을 돌리면 삼나무, 촉촉한 담뱃잎, 시가 박스 향이 피어오르고, 공기와 만날수록 카카오와 트러플 향이 서서히 열립니다. 흙내음도 우아하게 뒤따릅니다. 촘촘하게 짜인 타닌이 밀도와 힘을 보여주지만, 산도가 팽팽하게 긴장감을 잡아줘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짭조름한 미네랄과 검은 과일 잼의 은은한 단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소갈비 스테이크, 등심구이, 오리 가슴살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우리 음식으로는 양념 소갈비구이나 갈비찜과 함께하면 좋습니다.
현재 국내에는 2016년 빈티지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2016년은 보르도 우안에서 ‘반전의 빈티지’로 불립니다. 봄에는 폭우가 쏟아져 농부들의 애를 태웠지만,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는 섭씨 30도가 넘는 덥고 메마른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올드 바인들은 깊이 뻗은 뿌리로 땅속 물을 끌어올리며 버텼고, 포도알은 작고 단단하게 영글었습니다. 수확을 앞둔 9월 13일에는 기다리던 단비가 내려 지친 포도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어진 따뜻한 낮과 서늘한 밤이 메를로를 거친 구석 없이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가장 좋은 구획의 메를로를 중심으로 만듭니다. 손으로 수확해 콘크리트 탱크에서 발효한 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2개월 숙성합니다. 지금 마셔도 좋지만, 1976년산 매그넘이 보여주듯 오래 두고 기다릴수록 더 깊어지는 와인입니다. 프랑스 와인 평가 매체 질베르 에 가이야르(Gilbert & Gaillard)의 2020년 국제 콩쿠르에서 91점으로 더블 골드 메달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당시 아직 영하지만 앞날이 매우 기대되는 와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샤토 투르 그랑 포리 클로 그랑 포리(Clos Grand Faurie)
뒤소 가문 시절 이 땅의 옛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와인입니다. 밝고 맑은 루비색에 블랙커런트, 붉은 자두, 라즈베리 같은 싱그러운 과일 향이 직관적으로 피어납니다. 은은한 야생 허브와 제비꽃 향이 화사함을 더합니다. 미디엄 풀바디에 타닌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영한 빈티지를 지금 바로 열어도 즐겁습니다. 산미가 적당해 입안이 산뜻하고, 잘 익은 베리와 가벼운 스파이스의 여운이 깔끔하게 떨어집니다. 스테이크나 양갈비는 물론 불고기, 떡갈비처럼 달콤 짭조름한 고기 요리와도 편하게 어울립니다.
철분이 섞인 점토석회 토양의 싱글 빈야드 포도로 만듭니다. 메를로 70%, 카베르네 프랑 30%를 섞었습니다. 손으로 수확해 콘크리트 탱크에서 발효한 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8개월 숙성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14~14.5%입니다.
▶샤토 투르 그랑 포리 레포리 퀴베 프레스티지(L'Efaurie Cuvée Prestige)
와이너리 라인업의 맨 꼭대기에 있는 최고급 와인입니다. 야생 블루베리, 블랙베리 향에 토스트, 다크 코코아, 바닐라, 정향의 스파이시함이 겹겹이 쌓입니다. 입안을 압도하는 풀바디로, 촘촘하고 단단한 타닌이 뼈대를 세우고, 가죽과 에스프레소의 여운이 길고 묵직하게 이어집니다. 두툼한 소갈비 스테이크, 사냥고기, 양고기 구이, 오래 끓인 스튜와 잘 맞습니다. 콩테처럼 숙성된 치즈와도 훌륭한 짝입니다.
이 와인의 진짜 재미는 블렌딩에 있습니다. 메를로와 말벡을 정확히 50%씩 섞었습니다. 메를로가 주인공인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에서 말벡을 절반이나 쓰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메를로는 부드러움과 과일 향을, 말벡은 짙은 색과 단단한 구조를 책임집니다. 수령 50년이 넘는 올드 바인 포도를 손으로 따서 꼼꼼히 고른 뒤 100% 프랑스산 새 오크통에서 18개월 넘게 숙성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14.5~15%입니다. 영할때는 1~2시간 전에 열어두거나 디캔팅하면 좋습니다.
▶샤토 투르 그랑 포리 페티-디본(Feytit-Divon)
가문의 역사가 뿌리내린 땅에서 나오는 와인입니다. 뒤소 가문이 피에르 페티의 헌신을 인정해 넘겨준 생조르주 생테밀리옹 ‘디본(Divon)’의 포도로 만듭니다. 농축된 블랙 체리, 말린 아몬드, 쌉싸름한 코코아 향이 로스팅한 원두 향과 얽혀 복합미를 뽐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혀를 누르는 타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크리미한 질감과 과일의 감칠맛이 입안을 꽉 채웁니다. 잘 익은 체리 잼과 카카오의 진한 풍미도 길게 이어집니다. 소고기 구이, 양고기, 로스트 치킨, 숙성 치즈와 잘 어울립니다.
메를로 100%로 만듭니다. 밭은 1.25ha에 불과한 점토질 경사면으로, 40년에서 최고 100년 된 나무들이 자랍니다. 손으로 줄기를 떼고 압착한 뒤 새 오크통에서 직접 발효하는 소량 생산 방식을 씁니다. 생테밀리옹 위성 AOC 등급이지만 그랑 크뤼와 똑같은 정성을 쏟아붓는 숨은 강자입니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8개월 숙성하고, 수확 후 최소 2년이 지나서야 병에 담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14.5% 안팎입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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