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형 없이도 형사사법 체계 안정적 유지”
유엔 사형폐지 의정서 가입 제언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사형집행이 중단된 지 30년을 앞두고 사형제 폐지를 위한 입법적·제도적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극형 없이도 사회 안전과 형사사법 체계를 유지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법률적 존치 여부를 재검토할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은 10일 제24회 ‘세계 사형 폐지의 날’을 맞아 성명을 내고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30일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내년이면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30년이 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안전망 강화와 ‘생명 박탈’ 형벌은 분리해야”
안 위원장은 “지난 30년의 경험은 단순히 형벌 집행의 유예라는 사실을 넘어, 극형을 실제로 집행하지 않고도 사회의 안전과 형사사법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해 준 소중한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형제도의 법률적 존치 여부에 관한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사형제 폐지 흐름은 뚜렷하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국가의 4분의 3에 달하는 145개국이 법률상 또는 사실상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
인권위는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가족의 고통, 안전한 사회를 바라는 국민적 요구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짚었다. 다만 피해자 권리 보장 및 사회 안전망 강화와 국가가 형벌로 개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제도를 유지하는 문제는 엄격히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한번 집행되면 어떤 사후 절차로도 돌이킬 수 없는 사형의 ‘비가역성’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정부와 국회가 그간 축적된 우리 사회의 경험과 국제인권기준, 범죄 피해자 보호 및 국민 안전에 관한 관점을 토대로 사형제 폐지에 관한 입법적·제도적 방향을 검토해야 한다”며 유엔 ‘사형폐지 의정서’ 가입 논의도 함께 추진할 것을 제언했다.
◆미결수 52명·평균 58.7세
국제엠네스티는 한국이 1997년 12월 이후 현재까지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점을 고려해 2007년부터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법무부 교정본부에 따르면 현재 국내 교정시설에 수감된 사형수는 총 52명이다. 평균 연령은 58.7세로 50대가 29명으로 가장 많고 60대(10명), 70대(7명), 40대(5명), 30대(1명) 순이다. 1992년 종교시설 방화로 15명을 숨지게 한 원언식(69)이 35년째 수감 중인 최장기 사형수이며, 가장 최근 사형이 확정된 사례는 2014년 군부대 총기 난사로 5명을 살해한 임도빈(34)이다.
사형수는 형이 확정됐으나 집행되지 않은 미결수 신분으로, 교정 당국은 이들의 장기 수감에 따른 심리 상태를 고려해 종교인 접견 등 별도의 ‘심성 순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 논의도
사형제를 둘러싼 법적 논쟁도 진행형이다. 과거 형법은 사형 집행 시효를 30년으로 규정했으나 지난해 법 개정을 통해 시효가 아예 폐지됐다. 헌법재판소는 1996년과 2010년 사형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고, 현재 세번째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 중이다. 2022년 7월 공개 변론 이후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법원에서는 사형 제도가 사실상 사문화된 현실을 반영한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0일 광주지법은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장윤기에게 검찰의 사형 구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장기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사법 체계와 선례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들며 “피고인이 생존하는 동안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고 무기징역형을 철저히 집행하는 것만이 유족을 위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길”이라고 판시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사형을 대체할 형벌로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현행법상 무기수는 20년 이상 복역하면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해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는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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