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등 대표작 꼽혀
고전 번역가로도 눈부신 성취
2년 前 파킨슨병 투병 고백도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 시인·에세이스트·번역가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76)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한림원은 “고전 전통과의 유희적 대화를 통해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 온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정 이유로 밝혔다.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카슨은 토론토대에서 고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 고전문학 연구자였던 그는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 문학 속 욕망의 기쁨과 고통을 탐구한 첫 저서 ‘에로스, 달콤씁쓸한’(1986)을 펴내며 문단에 등장했다. 학문과 창작을 결합한 이 책은 이후 시와 소설,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예고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카슨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의 주제와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변주해온 작가다. 운문 소설 ‘빨강의 자서전’(1998)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대 영미권 문학계를 대표하는 비평가 해럴드 블룸(1930∼2019)은 그를 두고 “경이로운 작가(a stunning writer)”라고 평했다.
안데르스 올손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장은 “카슨의 거의 모든 문학 작업은 언어에 집착하는 문헌학자의 태도와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는 시인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 집중돼 있다”며 “고대 그리스인들부터 존 키츠,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브론테에 이르는 영향들을 병치함으로써 고전 시와 현대 시, 서로 다른 장르와 예술 형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희적이고도 아이러니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고전 번역가로서 성취도 높게 평가받는다. 한림원은 그의 번역서들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표 번역작으로는 사포(Sappho)의 시 단편들을 옮긴 ‘이프 낫, 윈터(If Not, Winter)’ 등이 있다.
카슨은 미국 프린스턴대·미시간대, 캐나다 맥길대 등에서 고전학을 가르쳤다. A. M. 클라인 상, 맥아더 펠로우십, 구겐하임 펠로우십, 그리핀 시 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2001년 ‘남편의 아름다움’으로 T. S. 엘리엇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됐다. 2020년에는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혁신적인 시학을 구축하고 동시대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는 평가와 함께 아스투리아스 공주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각예술가인 남편 로버트 커리와 함께 아이슬란드에 살고 있으며, 2022년 아이슬란드 시민권을 취득했다. 한림원 사무총장 잉그리드 칼베리는 “수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연락했을 때 카슨은 아이슬란드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며 “그가 매우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2010년 출간한 ‘녹스’는 오랜 세월 연락이 끊겼던 뒤 세상을 떠난 오빠를 다룬 작품이다. 올손 위원장은 이를 두고 “사진과 편지, 각종 문서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펼칠 수 있는 형태로 담아낸 상자 형식의 작품으로, 죽은 오빠에게 바치는 문학적이면서도 조각적인 묘비명”이라고 평했다. 책에는 로마 시인 카툴루스가 형제를 추모하며 쓴 비가(悲歌)를 카슨이 번역한 글도 수록됐다.
‘녹스’를 번역한 윤경희 문학평론가는 “카슨의 독보적 성취는 어떤 글에서든 고대 문헌의 형식과 내용, 작법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되살려 실험한다는 것”이라며 “고대 시인과 극작가의 작품을 번역할 때도 소위 직역에 충실하기보다 즉흥과 자유분방의 정신으로 매번 다르게 옮기며 언어의 운동을 극대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카슨의 글쓰기에는 노래, 문자, 언어, 글쓰기에 대한 인간의 오랜 사랑이 압축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카슨은 2024년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기고문에서 파킨슨병 진단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필체가 무너져 내린 것이 특히 고통스러웠다”며 “악필은 추할 뿐 아니라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었다. 손글씨를 잃어가는 경험을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론과 사이 톰블리의 회화, 복싱 이야기와 엮어 풀어낸 이 기고는 질병의 기록을 넘어 언어와 글쓰기의 의미를 탐구한 글로 주목받았다.
노벨문학상 상금은 12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6억원). 시상식은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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