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살았던 곳 벗어나 집으로
이상적인 삶의 조건 갖췄어도
계속 살아가게 할 서사는 없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요정 칼립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섬에 표류해 온 뒤에 오디세우스는 자신과 7년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자가 자꾸 묻는다. 내게 아내가 있었나? 호메로스 원전을 보면 오디세우스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운다. 두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 칼립소는 따진다. 왜냐고.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답한다. “아내 페넬로페가 외모와 키에서 그대만 못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럼에도 나는 집에 돌아가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다오.”
호메로스도 오디세우스의 귀향 욕망의 심리적인 뿌리까지 설명하지 못한다. 아내와 아들이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냐고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반문할지 모른다. 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고자 한다. 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요정 칼립소의 섬은 호메로스가 만들어 놓은 극단적인 사고 실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먹을 것은 넘치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연인이 있다. 일 안 해도 된다. 칼립소는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주겠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조건이다.
지난 3월에 나온 리뷰 논문은 동물행동학의 ‘홈베이스’ 연구를 소개한다. 낯선 공간에 풀어놓으면 쥐는 아무렇게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한 지점을 골라 그곳에서 쉬고, 그곳을 기준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 나갈 때는 천천히 두리번거리지만, 돌아올 때는 빠르고 곧장 온다. 세상을 탐험하려면 먼저 기준점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홈베이스만으로는 오디세우스의 귀향 욕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홈베이스’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실제 사람은 새 장소에 정을 붙이고 산다. 환경심리학에 ‘장소 애착’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쌓이면 낯선 곳도 고향으로 바뀐다는 걸 말한다.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을 피해 폴란드로 건너간 우크라이나 난민 1000여명을 조사한 2025년 연구가 있다. 연구를 보면, 폴란드의 현재 거주 도시에 애착을 형성한 사람일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았다. 반대로 옛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이 높고, 삶의 만족도는 낮았다. 새로운 곳도 고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왜 칼립소 동굴은 7년이 지나도 오디세우스의 집이 되지 못했을까. 오디세우스는 칼립소를 ‘원하지 않는 남자’가 되었을까.
1950년대 미국 보스턴의 웨스트엔드 지역이 도시재개발 대상이 됐다. 낡은 서민 동네를 철거하고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사회심리학자 마크 프리드(보스턴 칼리지)가 집단 이주 전후 주민 수백 명을 추적했다. 이사하고 슬펐는지, 우울했는지, 그 감정이 얼마나 오래갔는지 물었다. 여성의 46%, 남성의 38%가 심한 ‘애도’ 반응을 보였다. 여성의 26%는 이주 2년 뒤에도 슬프거나 우울하다고 했다. 마크 프리드는 이 현상을 ‘잃어버린 집을 애도하다’라는 글(1963년)로 남겼다. 사라진 건 집 벽돌과 지붕이 아니었다. 익숙한 이웃, 매일 마주치던 얼굴, 그 동네에서 자신이 차지하던 공간, 그 모두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자기연속성’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내가 한 사람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2025년 발표된 한 논문 제목은 절묘하다. ‘이타카를 찾아서’. 이타카는 오디세우스의 고향이다. 논문 저자들은 미국인 40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쪽은 자신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를, 다른 쪽은 평범한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는 “내가 과거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가”, “내 삶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느끼는가”와 같은 질문을 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를 생각한 사람들의 자기연속성이 더 높았다.
다른 연구도 있다. 2022년 한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자기연속성이 높아졌다. 연구자들은 그 이유를 따져봤다.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서사’(narrative)였다.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나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할 수 있다는 느낌이 사람의 자기연속성을 높였다.
이 틀로 보면 왜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려 했나에 대한 답이 더 뚜렷해진다. 칼립소의 섬에서 그의 삶은 멈춰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칼립소는 그에게 오디세우스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줄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가자고 했던 건 단순히 집이 아니다. 자신을 찾아 칼립소를 떠났다. 20년 동안 흩어진 자신을 찾아, 자기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이타카에 가야 했다.
최준석 과학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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