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시즌 만장일치 통합 MVP로 완벽한 마침표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일본의 하위권 팀. 2009년, 이곳에 스물한 살의 한국인 공격수가 발을 들였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적하자마자 개막 25연승을 내달리며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창단 54년 만의 첫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첫 시즌엔 득점왕, 두 번째 시즌엔 MVP였다.
이 믿기 힘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배구 여제’ 김연경(38)이다.
세계 무대를 평정한 그의 선수 생활이 벤치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연경을 만든 밑천은 그 시절 홀로 다진 기본기였다.
낮은 곳에서 배운 것들
경기도 안산의 한 중학교 체육관. 어린 김연경은 배구부 경기가 열릴 때마다 벤치를 지켰다. 3학년이 되도록 키는 170㎝ 남짓이었다. 공격수로 뛰고 싶었지만 코트에 설 기회는 공을 올려주거나 수비를 맡는 자리가 전부였다. 코트 위 당당한 ‘식빵언니’가 되기 한참 전의 일이다.
당시 그는 공을 때리는 법보다 받는 법을 먼저 몸으로 익혔다. 서브를 받아내고, 스파이크를 걷어 올리고, 공격수에게 공을 띄워주는 일. 작은 수비 요원을 눈여겨보는 곳은 없었다. 자신을 받아줄 고등학교가 없을까 봐 축구 전향을 고민했을 만큼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훈련을 놓지 않았다. 동료들이 쉴 때면 혼자 남아 ‘보충 수업’을 했다. 언젠가 강스파이크를 내리꽂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공격 훈련도 거르지 않았다. 훗날 그가 에세이 ‘지금 나를 위해 해야 하는 것들’에서 고백한 벤치 시절이다.
반전은 고교 진학 후 찾아왔다. 3년 동안 키가 20㎝ 넘게 자란 것이다. 급성장과 함께 그는 레프트 공격수로 자리를 옮겼다. 높은 타점에 벤치 시절 익힌 수비력이 더해지자 코트 위 빈틈이 사라졌다.
고교 무대를 평정한 그는 3학년이던 2005년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됐고, 그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첫 시즌부터 팀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며 신인상과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MVP를 싹쓸이했다. 한국 프로배구 역사상 유례없는 대형 신인의 등장이었다.
일본에서 쓴 첫 기적, 세계를 향한 도약
화려한 데뷔 뒤에는 부상이라는 악재가 찾아왔다. 데뷔 시즌의 높은 공격 점유율이 결국 무릎에 부담을 안겼다. 2006년부터 3년 연속 수술대에 올랐다. 재활이 끝나기도 전에 국가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는 혹독한 일정이 반복됐다.
하지만 부상도 해외 무대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009년 흥국생명 소속을 유지한 채 일본 JT 마블러스로 임대됐다. 프로배구 출범 이후 여자 선수 최초의 해외 진출이었다. 상대 팀 감독 입에서 “일본에서도 100년에 한 번 나올 선수”라는 말이 나왔다. 일본 리그를 평정하는 데 두 시즌이면 충분했다.
2011년에는 세계 최고 리그로 꼽히는 튀르키예 무대로 향했다. 유럽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다. 그는 결과로 답했다. 진출 첫 시즌 만에 팀의 창단 첫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견인했고, 대회 MVP와 득점왕까지 휩쓸었다.
세계 정상에 오른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느 팀을 가든 동료들은 그를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꼽았다. 동료들이 쉴 때 혼자 남던 안산의 중학생 그대로였다.
메달보다 빛난 MVP, 그리고 “해보자”
2012년 런던 올림픽. 한국 여자배구는 4위로 대회를 마쳤다. 메달은 없었다. 그런데 대회 MVP의 영광은 김연경에게 돌아갔다. 시상대에 오르지 못한 선수가 대회 최고 선수로 선정되는 이례적인 순간이었다. 세계 배구계가 그의 압도적인 기량을 인정한 결과였다.
9년 뒤 도쿄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도미니카공화국과의 조별리그. 풀세트 접전 속 작전타임에서 동료들에게 건넨 한마디는 그해 여름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정상에서 끝낸 라스트 댄스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내려놓은 그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 친정팀 흥국생명에서의 통합 우승이었다. 그러나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국내 복귀 이후 세 차례나 우승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지난해 2월, 그는 성적과 관계없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봄, 마지막 챔피언결정전에서 정관장을 꺾었다. 세 번의 아쉬움 끝에 마침내 올라선 정상이었다.
37세의 나이에도 그는 리그 득점 7위, 공격 성공률 2위, 리시브 효율 2위에 오르며 만장일치 통합 MVP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프로 데뷔 첫해 들어 올렸던 우승 트로피를 다시 품에 안으며 선수 생활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감독 김연경, 구단주 김연경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김연경은 자신의 이름을 딴 ‘KYK 파운데이션’을 통해 유소년 선수 장학 사업을 시작했다. 배구로 시작한 지원 사업은 어느새 11개 종목으로 확대됐다. 올해는 장학생 13명을 선발해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기회가 필요한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방출·은퇴 선수 등을 모아 신생팀을 이끈 예능 프로그램 ‘신인감독 김연경’은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를 기록하며 시즌2 제작까지 확정 지었다. 지난 4월에는 미국 여자배구 리그(LOVB)의 신생 구단 샌프란시스코의 공동 구단주로 참여했다. 선수를 육성하고, 새로운 무대를 만들고, 이제는 구단 경영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김연경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는 나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매일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 이 아름다운 경쟁에 당당하게 임하는 한 나는 언제나 승자로 남을 것이다.”
키가 작아 벤치를 지키던 소녀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됐다. 그를 정상으로 이끈 것은 타고난 신체 조건만이 아니었다. 벤치에서 묵묵히 익힌 기본기와 끝내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다. 이제 김연경은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 다음 세대가 설 수 있도록, 코트 밖에서 또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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