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길고 고된 정련의 결과물이다. 몸으로 정직하게 관객을 만나야 하는 무용수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발레단에서 오전마다 한 시간 남짓 열리는 클래스(일일 훈련)는 무용수들이 매일 예술에 바치는 제의이자, 흐트러진 자신을 다시 다잡는 시간이다.
서울시발레단은 여름철 이 클래스의 문을 외부에 연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가 휴가차 귀국하고 전공 학생들이 방학을 맞는 시기라는 데 착안한 기획이다. 올해도 유망한 전공생과 여름을 맞아 일시 귀국한 K발레 무용수들이 함께 바를 잡았다.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솔리스트 최지현과 캐나다 앨버타 발레단 입단을 앞둔 김호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섯 살에 발레를 시작한 그때부터 클래스를 해왔습니다. 클래스는 제게 초심을 찾는 시간입니다. ‘플리에’처럼 유치원생 때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본 동작을 십수 년째 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지 정하는 명상 같은 시간입니다. 오늘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픈 곳이 있다면 그 부위를 어떻게 쓸지 점검합니다.”(최지현)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클래스를 해왔습니다. 제게 클래스는 간단하지만 무조건 필요한 것입니다. 발레를 하는 이상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김호연)
지난 17일 서울 마포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연습실에서 한 시간 남짓 진행된 클래스는 그 자체가 기승전결을 갖춘 하나의 무대였다. 한 손으로 바를 잡고 플리에로 발목·무릎·고관절을 차례로 열며 몸의 수직축과 회전 기능을 점검한다. 발끝을 바닥에 밀어내는 탕뒤로 다리의 선을 가다듬고, 다리로 원을 그리는 롱 드 장브로 골반의 안정을 확인한다. 바를 놓고 무대 한가운데로 나오면 이제 중심을 스스로 잡아야 한다. 느린 아다지오로 균형과 상체의 표현을 다스리고, 빠른 알레그로로 리듬과 발의 민첩함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클래스의 끝에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허공에 솟구치는 그랑 알레그로의 도약이 만들어진다. 매일 같은 순서를 반복하는 이 정비의 시간 끝에서야 무대 위에서 도약하고 비상할 수 있다.
최지현은 “샌프란시스코발레단에서는 클래스가 유급 시간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라며 “그래도 매일 나간다. 어쩌다 못 나가면 친구들한테 ‘너 죽었니’라고 전화 온다”고 말했다.
최지현이 몸담은 샌프란시스코발레단은 1933년 창단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이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을 미국에서 처음 전막공연했다. 최지현은 서울예고 재학 중 출전한 2019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샌프란시스코발레학교 교장의 제안을 받아 전액 장학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가자마자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으나 군무 단원으로 입단한 뒤, 지난해 두 단계를 한 번에 올라 솔리스트가 됐다.
“코로나 때는 공연도 리허설도 없어 다른 길을 시작해야 하나 싶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집이나 스튜디오를 빌려 혼자 클래스를 하고, 영상을 많이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배역을 맡는 솔리스트로서의 마음가짐을 묻자 그는 데미 솔리스트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솔리스트가 된 경우라 부담도 컸다고 했다. “코르 드 발레 시절은 정말 힘들었어요. 전막 발레에서 군무를 하면서 어쩌다 솔로 기회가 오면 그것도 해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 해요.”
이제 솔리스트로서 더 많은 기회를 갖게된 최지현은 앞으로 서고 싶은 무대로 ‘지젤’을 꼽았다. “‘지젤’은 긴 튀튀(무용복)를 입고 ‘폴 드 브라(팔동작)’를 많이 쓰는데, 그 팔의 움직임과 각도가 좋습니다. 아다지오를 좋아해요.”
최지현은 최근 전설적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에게 직접 지도도 받았다. “이번에 포사이스의 ‘블레이크 웍스’를 추고 왔습니다. 포사이스가 직접 와서 지도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임스 블레이크의 음악을 쓰는 작품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보컬과 드럼이 있는 음악인데, 무대 위에서 누군가의 캐릭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지현으로서 몸을 쓰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선화예고·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스쿨을 거친 김호연이 입단을 앞둔 무용단은 캐나다 주요 발레단이다. 그의 첫 프로 계약 역시 클래스에서 시작됐다. 대규모 청소년 발레 경연인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YAGP)에 참가했는데, 그 과정에 마련된 스칼라십 클래스에서 앨버타 발레단에 발탁됐다. 여러 발레단 예술감독이 지켜보는 클래스가 끝나자 한 관계자가 김호연의 참가번호를 불렀다. “그때 제 번호가 870번이었습니다. 객석으로 가보니 앨버타 발레단 단장이 계셨고, 계약을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프로 무용수 생활을 시작하는 김호연은 발레를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릴 때는 인라인스케이트나 축구·야구·농구를 좋아했고, 발레를 시작한 첫 한 달은 정말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화예중에서 발레를 전공하면서 발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압도적으로 잘하면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이것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그는 앨버타 발레단에서 만날 첫 작품이 ‘지젤’로 알고 있다며 “열심히 해서 주역으로 춤추는 것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먼저 해외 무대에 자리 잡은 최지현은 후배에게 “중견 발레단이 오히려 더 많이 춤추고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며 조언을 건넸다. 대형 발레단은 경쟁이 치열해 승급이 어렵고 기회가 짧을 수 있지만, 중소 규모에서는 작품에 잘 맞으면 계급과 상관없이 중요한 배역을 맡으며 대폭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용수는 직업 수명이 짧은 만큼 어리고 건강할 때 많이 춰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최지현, 김호연 모두 해외 콩쿠르 등에서 발탁된 경우여서 한국 무대에 서는 것도 지금 가진 꿈 중 하나다. 최지현은 “기회가 있다면 한국 무대에 너무 감사하게 서고 싶다”며 “매일 기도하는 소원 중 하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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